[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까닭 가운데 하나로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동 정벌을 한다면 명나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할 텐데, 정도전은 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을까요?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 간 뒤, 요동은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명나라도 새로 나라를 세워 안팎으로 나라 기틀을 잡는데, 힘을 쏟느라고 아직 요동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기에는 힘이 달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요동은 원래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라서, 명나라로서는 고려나 뒤를 이은 조선이 이를 차지하려 들까 봐 꽤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이미 공민왕 때인 1370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온 일도 있으니까요. 우왕 14년(1388)에도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위의 반환을 요구하여, 이에 반발한 고려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기도 하였지요. 이제 친명정책을 추구하는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국경 분쟁은 없을 줄 알았는데, 명나라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자꾸 시비를 겁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명나라에 조선 건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5) 승정원은 ‘목구멍과 혀(喉舌)’에 해당하는 부서로, 왕명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부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개국 이래로 승지에 임명된 경우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세속에서는 은대학사(銀臺學士)라고 일컬었다. 시중드는 하인들도 모두 은패(銀牌)를 차고 자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겼다. 순암집》- 승정원.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과 같은 관청이다.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할 수 있어 소속 관원들의 자부심과 권한도 대단했다. 승정원은 관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왕명을 전달하는 청렴함과 과중한 업무를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승정원일기번역팀이 펴낸 이 책, 《후설》은 승정원일기와 승정원에서 일하던 관원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덜 알려져 있으면서도 분량이나 내용에서 뒤지지 않는 승정원일기를 조명하는 책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종의 ‘국정일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처별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업무지시를 고스란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목민심서의 산실인 사의재 (돌) 주막집 사랑방에서 바뤘나 (빛)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으로 (달) 유배의 길에도 의를 세웠네 (심)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신유박해의 여파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 약 4년 동안을 강진 읍내의 한 주막집 사랑방에 머물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되어 낯선 남도의 객지 주막방에 기거하게 된 그의 처지는, 조선 후기 지식인이 겪은 정치적 박해와 시대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바람을 막는 허름한 방, 떠도는 장정과 나그네가 오가는 주막집 한쪽 편에서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학문과 성찰에 더욱 몰두하였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수많은 저술의 씨앗 또한 이 시기의 고독한 사색과 절제된 삶 속에서 잉태되었다. 이 주막집 사랑방 문 위에 걸린 현판이 바로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하도록 경계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유배 생활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세운 삶의 규범이자 학문적ㆍ윤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