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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리 국보 이야기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매일경제신문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국보급’ 선수, ‘국보급’ 작품, ‘국보급’ 노래…

그 어떤 것이라도 ‘국보급’이라는 표현이 붙으면 값어치가 격상된다. 그만큼 ’국보‘가 보증하는 품격은 남다르다. 무언가 급이 다른 면모가 있어야 ’국보‘가 될 수 있는 만큼, 국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다.”라는 한국 미술사의 선각자 우현 고유섭이 남긴 말처럼,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문화유산은 전통의 발현이자 창조의 온상이다. 국보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국민에게 느끼게 해주는 문화적 자부심, 정신적 위안은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다.

 

배한철이 쓴 이 책,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는 매일경제신문사에서 25년 이상 기자로 일한 지은이가 역사 사랑을 꾸준히 이어간 결과물이다. 지은이는 ‘문화유산’과 ‘한국사’라는 두 주제에 천착해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책과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를 펴내기도 했다.

 

 

책은 크게 8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발굴 현장 답사기’, ‘돌아온 국보, 팔려간 국보’,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 등 국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의 고된 여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국보 제작 비하인드’와 같이 국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던 예술가의 삶을 다루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 시대에 전해졌다는 사실이 신기한 문화유산은 ‘해인사 대장경판’이다. 이 국보는 사실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던 것이었고, 여러 차례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심지어 태종과 세종도 계속되는 요구를 귀찮게 여겨 대장경판을 주려고 했지만, 조정 대신들이 반대한 덕분에 지켜질 수 있었다.

 

(p.117-118)

일본은 단 하나뿐인 대장경판 자체를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사신단까지 파견해 대장경을 얻어가는 것은 일본으로서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경판을 확보한다면 일본 땅에서도 찍을 수 있고 조선에도 더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1414년(태종 14) 일본 측이 경판을 요청하자 태종은 “경판을 주면 다시 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예조에서 “경판을 보낸다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해 무산됐다. 1423년(세종 5)에도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 등 135인이 떼로 몰려와 토산물을 올리고 대장경판을 달라고 졸랐다. 세종은 “대장경판이 무용지물”이라며 넘기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막았다.

 

그 뒤에도 일본은 여러 차례 대장경판을 달라고 졸랐지만, 조선 조정은 끝내 대장경을 내주지 않았다. 불교를 억압하는 사회 통념상 대장경판을 드러내놓고 중히 여기진 않아도, 내심 높은 값어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2주 만에 성주로 진입하면서 성주 서쪽에 있던 가야산 해인사는 풍전등화의 처지였다. 일본이 개국 초기부터 노리던 대장경판이 약탈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이끄는 의병과 승려 소암이 이끄는 승병이 거병해 성주를 지켜냈다.

 

의병과 승병 5,000여 명은 왜군 2만 명을 공격해 성주성에 몰아넣고 세 차례 대규모 공격을 퍼부었다. 왜군이 김천과 선산으로 퇴각하고 낙동강 서부가 수복되면서 해인사 대장경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한 채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해인사 대장경판이 유일하다.

 

그 뒤로도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해인사에 일곱 번이나 화재가 발생했어도 대장경은 무사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이 대장경을 통째로 갖고 가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땅에 남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의 위기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렇듯 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위기 때마다 용기를 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이들이 헌신적으로 유물을 보호하여 국립박물관의 유물이 무사히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전쟁 상황에서, 본인의 안위보다 유물의 안전을 더 걱정한 이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148)

한국전쟁이라는 대참화 속에서도 국보들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간파한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은 진열장의 유물을 모두 꺼내 포장하여 유물창고에 넣어두라고 지시했다. 유물을 정리하느라 김 관장과 최순우, 진홍섭 등 대부분의 박물관 직원이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켜진 우리 문화유산은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쓰는 우리 문화의 근간이다. 우리 문화의 뿌리는 튼튼하고 깊기에,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힘도 그만큼 강력하다. 뿌리 깊은 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맺듯, 우리 문화가 세계 곳곳에서 맺고 있는 결실 또한 그렇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 국보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되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국보가 오늘날 우리에게 오기까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이전의 국보 사진도 다수 수록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무수히 많은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국보. 이제 더 이상의 위기는 없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아껴주어야 한다. 관심 있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소중해지는 것이 우리 국보다. 문화유산 보호와 활용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