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신라 하대의 산문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경전의 뜻을 글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직접 바라보아 본성을 깨닫고자 하는 선종(禪宗)이 당나라에서 들어왔다. 선종의 전래는 단지 새로운 불교사상의 유입만을 뜻하지 않았다. 선승들이 당나라의 쩔에서 생활하며 익힌 수행 방식과 일상의 규범, 공양과 음다의 풍속도 함께 바다를 건너왔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곡성 태안사의 적인선사 혜철과 광양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慧徹, 785~861)은 신라 서라벌 출신으로,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웠다. 경전과 계율을 익힌 그는 서른 살이 되던 814년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선법을 배우고 심인(心印, 처님의 깨달음)을 받았다. 이후 중국의 여러 지역을 편력하고 천태산 국청사에 머물렀으며, 서주 부사사에서는 대장경을 공부하였다. 839년 귀국한 뒤 무주의 쌍봉사를 거쳐 곡성 태안사에 머물면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열었다. 혜철이 중국에서 어떤 차를 마셨는지, 제자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차를 달여 주었는지를 알려 주는 직접 기록은 남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나라가 스승을 필요로 하는 때는 태평성대만이 아니다. 오히려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고 백성의 삶이 불안해지는 난세일수록, 세상을 바르게 이끌 정신의 스승이 절실하다. 신라 말의 선승 징효대사 절중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절중은 826년 휴암(鵂嵒),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일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오관산사(五冠山寺)에 들어가 진전법사(珍傳法師)에게 출가하였고, 열다섯 살에는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을 배웠다. 열아홉 살에는 장곡사에서 구족계(具足戒,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그는 경전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의 근원을 직접 밝히고자 했다. 금강산 장담사로 도윤선사(道允禪師)를 찾아가 사자산문의 법맥을 이었으며, 뒤에는 도담선원의 자인선사(慈忍禪師) 문하에서 십육 년 동안 참선 수행에 전념하였다. 오랜 수행을 마친 절중에게 세상의 명예와 벼슬은 마음을 붙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882년 전 국통 위공이 그를 곡산사 주지로 추천했으나, 절중은 왕경과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침, 사자산의 운예선사가 간절히 청하자, 제자들을 이끌고 흥녕선원(興寧禪院)으로 들어갔다. 헌강왕은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또 하나의 신라 왕실과 산문에 얽힌 차의 이야기는 지리산 선맥을 이은 수철화상에 관한 기록이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말 실상산문의 선승이다. 생년은 자료에 따라 815년 또는 817년으로 두 가지가 전하지만, 893년 입적한 사실은 분명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는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출가하였다. 여러 스승에게 경전과 계율을 배운 뒤 지리산 실상사로 들어가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의 법을 이었다. 이후 심원사와 실상사를 중심으로 선법을 펼치며 신라 왕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수철은 경문왕의 부름을 받아 왕궁에서 선과 교의 같고 다름에 관해 문답하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헌강왕과 진성여왕 때에도 왕실의 존경은 이어졌으며, 그는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수철은 왕실의 화려함에 머물지 않았다. 다시 산으로 돌아가 수행하고 대중을 가르쳤다. 그의 법은 궁궐 안에서 권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산중의 고요함 속에서 생명을 얻었다. 893년, 수철은 제자들을 불러 자기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렸다. “죽음이 장차 이르렀으니 나는 이제 가고자 한다. 그대들은 더욱 힘써 마땅히 부처의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신라 말,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고 지방의 새로운 세력들이 일어나던 시대에 산문(山門)은 단순히 불법을 닦는 수행처에 머물지 않았다. 혼란한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세우고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열어 가는 또 하나의 중심이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낭혜화상 무염(無染)과 헌안왕의 인연도 그러하였다. 임금은 무염에게 차와 향을 보내며 군왕의 자리에서 스승을 받드는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그 차는 권력자가 고승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라, 임금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낮추어 도를 구한 '존사차(尊師茶)'였다. 헌안왕의 차에 담긴 공경은 무염 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임금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남쪽 산중에서 수행하던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왕경으로 맞아들이고자 하였다. 이때 임금이 보낸 차는 스승을 높이는 '공경차(恭敬茶)'였으며, 먼 산중의 선사를 나라의 정신적 스승으로 맞이하려는 '영접차(迎接茶)'이기도 하였다. 보조선사 체징은 804년 웅진, 오늘날 공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이다. 어려서 출가한 그는 경전과 계율을 익히는 데 머물지 않고 마음의 근원을 직접 밝히는 선법을 구하였다. 당시 신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그때 헌안대왕은 멀리서 제자의 예를 표하고, 차와 향을 예물로 보내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時憲安大王 遙展攝齋禮 贄以茗馞 使無虛月)"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신라 말, 왕궁에서 성주산의 깊은 절까지 달마다 차와 향이 전해졌다. 그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었다. 장차 왕위에 오를 사람이 산중의 선사를 스승으로 받들어, 제자의 예로 올린 공경의 예물이었다. 보내는 사람은 왕자였으나 마음은 제자였고, 받는 사람은 아무런 세속의 권세도 없는 수행자였으나 여섯 임금이 법을 묻던 큰 스승이었다. 차 한 봉과 향 한 자루에는 왕관보다 높고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동방의 대보살, 무염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0~888)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왕실의 혈통을 이었으나 세속의 영화를 쫓지 않고 열두 살에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출가하였다.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한 뒤, 821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선종의 새로운 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무염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곡산의 보철선사에게서 법맥을 이어받았다. 당나라에 머문 이십
[우리문화신문=손병철 철학박사/시인] 차는 사람이 달여 하늘에 올리는 공양으로 시작되었다. 맑은 샘물을 길어 불을 지피고, 어린 찻잎을 달여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 일은 곧 자신의 마음을 부처와 하늘에 바치는 수행이었다. 한국 차문화는 이러한 공양차(供養茶)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신라 차문화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이 하늘에 차를 올린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에게 차를 올렸다는 이야기. 그 주인공이 바로 오대산의 수행자 정신(淨神)이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에는 정신이 오대산 신성굴에 머물며 오십 년 동안 한결같이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세상을 떠돌지도 않았다. 다만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닦으며 오직 도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오십 년. 한 사람의 일생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계절은 수없이 바뀌고, 나무는 자라 숲이 되었으며, 함께 수행하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지만, 정신은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했을까. 《삼국유사》는 놀라운 장면을 기록한다. 정거천(淨居天)의 하늘 무리가 차를 달여 정신에게 공양하였다. 이 한 줄은 한국 차문화사에서 가장 신비롭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차 한 잔에도 역사가 흐른다. 차는 산사의 선방이나 문인의 서재에서만 향기를 피운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잊힐 뻔한 조상을 다시 불러들이는 제단 위에서도 말 없는 역사가 되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 삼국을 통합해 가던 격동의 시대, 그 중심에 김유신과 문무왕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군신(君臣)이면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가 문무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 그 혈맥은 모두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닿는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세손이었고, 문무왕은 어머니 문명왕후를 통하여 수로왕을 자신의 15대 시조로 받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통일은 신라가 가야ㆍ백제ㆍ고구려를 정복한 승자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가야의 혈맥이 신라 안에서 다시 살아나 통일을 이루고, 마침내 그 조상을 차향으로 기린 생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595년 신라에 귀속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그의 집안에는 가야의 멸망과 신라로의 귀속, 차별과 수용, 전쟁과 화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김대렴이 지리산에 심은 차씨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차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해서 곧 문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차는 수행을 만나야 도(道)가 되고, 시를 만나야 향기가 되며, 글을 만나야 역사가 된다. 그 위대한 만남을 이루어 낸 두 사람이 바로 진감국사 혜소와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한 사람은 선(禪)의 향기를 몸으로 실천한 수행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향기를 천년의 문자로 남긴 문장가였다. 차를 마신 이는 진감국사였고, 차의 정신을 역사로 승화시킨 이는 최치원이었다. 진감국사 혜소(774~850)는 젊은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스물일곱 해 동안 선을 배우고 수행하였다. 그는 차가 이미 선종 수행과 하나가 된 중국 선림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귀국한 뒤 하동 옥천사, 곧 오늘날의 쌍계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며, 지리산 차를 수행 속에 녹여 냈다. 그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이 바로 최치원이 지은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그 비문에는 진감국사가 산중에서 차를 달여 마시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차를 즐기기 위해 마신 것이 아니라 목마름을 적시고 마음을 맑히기 위해 마셨으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충담사의 차공양으로 향기를 얻었고, 월명사의 향가로 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 향기와 정신을 천년의 차밭으로 키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김대렴과 흥덕왕이다. 한 사람은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나라의 땅에 심게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알의 씨앗을 심은 일을 넘어, 한국 차문화사의 새로운 문명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흥덕왕조에는 짧지만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크게 성행하였다.” 불과 몇 구절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록은 한국 차문화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바다를 건너온 작은 차씨가 임금의 뜻을 만나 지리산에 심어지고, 마침내 천년을 이어 갈 차문화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김대렴을 우리나라에 차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료는 분명히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한다. 김대렴 이전에도 신라에는 차가 알려져 있었으며, 왕실이나 절을 중심으로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산중의 수행에서만 꽃핀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도 차향이 스며 있었고, 불전에도 차연이 올랐으며, 향가의 선율 속에도 차 한 잔의 맑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경덕왕(景德王)과 월명사(月明師)가 있다. 경덕왕은 신라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성숙한 시대를 이끈 군주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이 나라를 상징하고, 불교예술과 향가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실은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예(禮)와 공양, 그리고 덕을 나누는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월명사의 도솔가 (月明師兜率歌)에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은 월명사의 향가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품다(品茶) 일습(一襲)'을 내렸다고 하였다. '품다'는 문자 그대로는 차를 음미한다는 뜻이며, '일습'은 한 벌의 의복이나 예물을 가리킨다. 학자들 사이에는 차와 다구를 함께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차를 마시는 예를 베풀었다는 해석이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임금이 차를 으뜸 예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차가 이미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월명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