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0 (금)

  • 맑음동두천 10.3℃
  • 맑음강릉 14.5℃
  • 맑음서울 11.0℃
  • 맑음대전 10.8℃
  • 맑음대구 13.6℃
  • 맑음울산 13.6℃
  • 맑음광주 13.0℃
  • 맑음부산 14.9℃
  • 맑음고창 11.5℃
  • 구름많음제주 12.8℃
  • 맑음강화 9.7℃
  • 맑음보은 10.8℃
  • 맑음금산 12.2℃
  • 맑음강진군 14.3℃
  • 맑음경주시 14.7℃
  • 맑음거제 14.4℃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신라시대 차문화에 얽힌 이야기

신라의 차문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존재
[라석의 차와 시서화] 7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의 차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용히 스며들어 오랜 시간 축적된 문화였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개의 또렷한 기록들이 서로 이어지며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며 차나무 종자를 들여온 사건이다. 《삼국사기》에는 828년, 그가 가져온 차 종자를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수입의 사건이 아니라, 차가 개인의 기호를 넘어 나라 차원의 재배와 보급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이미 존재하던 차 마시는 풍속이 이때 비로소 뿌리를 내리고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기록 속에 이미 더 오래된 시간을 가리키는 문장이 함께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632~647) 시기, 곧 7세기 전반에 이미 차가 신라 사회에 알려지고 보급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그 당시의 차가 어느 정도로 퍼져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왕실이나 불교 문화권을 중심으로 차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진다. 이렇게 보면 대렴의 사건은 시작이 아니라 확장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산과 절로 이어진다. 지리산 자락의 화엄사에는 연기대사(緣起祖師)가 차 종자를 심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엄밀한 연대가 명확한 1차 사료라기보다는 여러 기록과 연구를 종합한 서술에 가깝지만, 통일신라 불교권과 차 재배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산중 절에서 차를 기르고 마시는 일은 단순한 생활이 아니라 수행의 일부였고, 자연과 마음을 잇는 매개였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유사》의 한 장면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던 두 왕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골짜기의 물을 길어 차를 달이고 그것을 공양으로 올렸다. 이 기록은 차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불교 의례에서 중요한 공양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맑은 물과 불, 그리고 잎을 달여 얻은 차는 수행자의 마음을 가다듬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이어주는 상징적인 매개였을 것이다.

 

 

한편, 차와 인물의 만남은 설화 속에서도 이어진다. 사복(蛇福, 아도, 이차돈, 원효, 의상 등과 함께 신라 불교를 빛낸 10명의 성인)이 차를 달여 원효(元曉)에게 올렸다는 이야기는 고려의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2)의 《동국이상국집》에 전한다. 비록 기록 자체는 신라 동시대의 것이 아니지만, 이 설화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원효와 차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차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깨달음과 나눔, 그리고 인간적인 온기를 담은 행위였다.

 

이렇게 살펴보면 신라의 차문화는 왕실, 절, 산중 수행자, 그리고 설화 속 인물들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살아 움직였다. 특히 불교와의 관계는 매우 깊어서, 차는 수행자의 일상과 의례를 잇는 중요한 매개였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또한 화랑도(花郞道)와 같은 청년 집단에서도 풍류와 더불어 차를 즐겼을 가능성이 이야기되지만, 이는 엄밀한 기록보다는 후대의 정리와 해석에 기대고 있다.

 

결국 신라의 차는 하나의 사건이나 한 인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리산에 심어진 작은 종자에서 시작해, 임금의 기록과 산사의 전승, 수행자의 공양, 그리고 설화 속의 따뜻한 장면까지 이어지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차는 그렇게 신라의 자연과 정신, 종교 의식과 수행 그리고 사람 사이를 잇는 조용한 흐름으로 통일신라 시대까지 흘러갔다. (불한티산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