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풍물과 함께 살아온, <남사당놀이> 지운하 명인의 입문(入門) 70돌을 기념하는 공연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남사당(男寺黨)놀이>는 국가가 지정한 무형유산의 한 종목이며, 평생을 몸담아 온 그를 위하여 동료와 후배, 제자들이 서울과 인천의 각기 다른 공연장에서 기념공연을 마련했다는 이야기, 그는 어려서부터 인천 도화동 풍물패의 상쇠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는데, 1950년대 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소속 단체가 대상을 받을 때, 어린 지운하는 12발 상모를 연출하여 최고의 인기상을 수상하였다는 이야기,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 <대성목재> 농악단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이후 <남사당-男寺黨>에 입단한 뒤, 70여 년 세월을 다양한 기, 예능들을 익히면서 지내 왔다고 했다.
공연 당일, 예악당 무대의 마지막 순서는 <흥, 멋, 한의 놀판>이었다. 이 대형 무대, 전체를 지휘하는 지운하 상쇠를 비롯하여 그 판굿에 참여한 모든 출연자의 기량이나 율동은 말 그대로 신명의 한판 무대였다.
특히, 이날 무대에 우정 출연자도 매우 인상적이다. 제일 먼저 무대에 선 남기문은 관록을 자랑하듯 깊이 있는 울림으로 <비나리>를 불러주었고, 김덕수와 함께하는 <앉은 반 사물놀이>는 긴장과 이완을 이어가며 원조(元祖) 사물놀이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으며 유지숙과 젊은 명창들의 <서도민요>는 애처로우면서도 신명의 소리로 오랜 여운을 남겼다.
오은명의 <살풀이춤> 또한 정갈한 정중동(靜中動)의 미를 연출하며 객석의 호응을 받았다. 뒤이어 장사익의 <소리판>이 이어졌는데, 그는 우리 귀에 익숙한 가요들을 연창하면서 객석의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 모두가 이날의 주인공, 지운하의 70여 년 풍물 인생을 축하하기 위해 나선 명인들이었다.
지운하는 어려서부터 풍물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고, 성장하면서부터는 <남사당놀이> 공연 현장, 예를 들면 월남전 맹호부대라든가, 워커힐 상설무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로부터 미국, 유럽 등 지구촌 무대에서 수없이 풍물공연을 펼쳐 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가 갖게 된 확신은 바로, 남사당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예(藝)와 기능(技能)의 정수가 담겨있는 대표적인 한국인들이 생활 속에서 함께 해 온 예술작품이라는 점이었다.
<국립국악원>의 지도위원을 은퇴한 뒤, 그는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와 지역의 남사당패를 재창단하고, <꼭두쇠> 역할을 하며 후진들을 지도하고 있는 중, 70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위에 나오는 재미있는 용어, <꼭두쇠>란 연희집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직함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단체를 대표하는 꼭두쇠는 엄격한 명령이나 규율로 남사당패를 운영해 왔다고 하는데, 충분히 수긍되는 말이다. 이들의 연희 종목이 누구나 쉽게 연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기예(技藝)가 아니고, 고난도의 그것이기에 그 종목들을 연행한다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판단하에 적당히 통솔하고, 적당히 운영해 왔다면, 과연 집단의 연희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관중들이 모여들었을까? 꼭두쇠의 능력이나 역할이 어떠해야 했는가? 하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된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 놀음>으로 시작되었던 동 종목은 1988년, 남사당패 연행 6종목 전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확대 지정하면서 그 이름도 원래의 이름인 <남사당놀이>라고 정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여 년이 지난,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참고로, <남사당패>가 연희해 온 여섯 종목은 첫째, <풍물놀이>로 각기 다른 악기와 춤으을 통해 흥겨운 놀이마당을 여는 순서이고, 둘째가 <버나 돌리기>, 셋째는 <땅재주 넘기>, 넷째는 <줄타기>, 다섯째는 <탈놀음>, 그리고 마지막은 <인형극>이다. 전용극장처럼 일정한 장소에서 벌이는 연희가 아니기에 다음의 연희 장소로 옮겨 갈 때, 준비물이나 소도구의 분량이 상당한 편이어서 소속 단원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6종목을 모두 펼쳐야 할 장소,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 근처나, 동네의 넓은 공터를 물색하고 고른다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공감이 된다.
오래전이다. 모 언론 매체에서 마주한 그와의 대담이 있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아 한 부분을 여기에 소개해 본다.
“남사당패 놀이를 해서 스승을 봉양해야 했고, 끼니를 연명해야 했던 하는 삐리(단체의 초보자를 부르는 이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한(恨)의 세월이었고, 또한 설움의 세월이었다”, “선생이 계시고 선배가 있으므로 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니만큼, 어른들을 성심껏 모시는 것이 후배들의 사명”이라는 대목이다. 이 시대 젊은 예, 기능인들을 향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라든가, 단체생활에 있어서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는, 그리고 그 것이 왜, 중요한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이 시대 꼭두쇠인 그의 충고 한마디였다.
오늘도 후배와 제자들에 둘러싸여 쇠를 치고, 상모를 돌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면, 지운하가 걸어 온 그 길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자랑스러운 길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하는 말, “숨 쉬는 한, 지속적으로 가야 할 길”임이 분명해 보인다.
바라건대, 건강관리 잘해서 90살에도, 기념 공연을 멋지게 하고, 또다시 10년 뒤, 100살 기념공연을 멋지게 열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용기와 패기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천천히 다가가는 나이 먹은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