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완창회의 시작은 1960년대 말, 박동진이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약 5시간 남짓의 <흥보가>를 한 자리에서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박동진의 완창 발표회는 처음과 끝을 갖춘 판소리의 완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점, 특히 완창 판소리가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장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는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완창회를 준비해 왔다는 점도 분명 의미가 깊은 그 만의 판소리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성경린 원장이 전해 준 말, “국립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도 받는 곳”'이라는 말에 매일 같이 새벽 출근을 하였다는 박동진의 이야기는 진정 명창의 길이 험난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열심히 연습하는 과정을 당시 젊은 연구원으로 있던 글쓴이도 여러 차례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그 앞 동네인 원서동에서 내려와 국악원 문을 두드리고는 곧바로 북을 들고 국악원 콘센트로 지은 창고 옆방으로 들어가 소리공부를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흥보가> 완창 발표를 시작으로 해서 <춘향가>, <심청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소리꾼, 노은주가 기억하는 성창순 명창은 실로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겐 친구와 같은 다정한 할머니로 기억되고 있을 정도다. 그 배경은 항상 부드러운 말씨와 다정한 웃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는가 하면, 수시로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등을 선물 할 정도로 자상하였던 분이었기에 더욱 잊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한농선 선생과 이별한 뒤, 성창순 선생도 타계하여 더더욱 슬픔이 컸다는 이야기, 한농선의 소리가 동편제의 꿋꿋하고 힘찬 소리제라면, 성창순의 소리는 아기자기한 서편제의 창법이어서 대조적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대통령상을 받은 노은주가 완창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그것도 처음이 아니라, 네 번째 갖는 완창회여서 더더욱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완창(完唱)한다는 말은 곧 <춘향가>나 <심청가>와 같은 소리 한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시간 한자리에서 부르는 형태의 공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완창 발표회를 열 계획이라던가, 또는 발표회를 열었다고 하면, 누구나 놀라면서 그 어렵고 힘든 공연을 어떻게 준비했느냐, 의아해하는 것이 일반적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도 잃은 노은주는 깊은 슬픔에 빠져 판소리와 단절하려 했으나 그에게 있어 판소리와의 결별은 불가능한 일임을 확인하게 되면서 성창순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노은주의 소리 공력이나 성실도를 인정한 성창순 명창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소리 공부한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전수자(傳授者)과정 이후에 이수자로도 당당하게 인정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수자(履修者)란 무형문화재 해당 종목의 수련 과정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전문가 길에 들어선 사람이란 뜻이며, 다음 단계가 ‘전승교육사’로 예능보유자(藝能保有者) 반열에 오르기 직전 단계라는 이야기, 문화재법은 이수자들에게도 전승교육사와 함께, 예능보유자 선정에 도전할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포기하려던 소리공부에 다시 불을 붙여 준 성창순은 어떤 명창인가? 노은주의 진심이 담긴 사모가(思慕歌)의 한 부분이다. “성창순 선생께 공부하면서 저는 3명의 아이를 출산했어요, 선생님은 우리 애들을 참 예뻐해 주셨지요. 선생님이 구기동의 4층 빌라에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뜬 이후, 어머니도 동시에 잃은 노은주는 소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으나, 어려서부터 몸에 밴 소리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쉽게 될 일인가!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때로는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절대 소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몸에 배어있는 소리와 단절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이미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소리는 노은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2년여 방황과 망설임 끝에 2004년 여름, 그는 성창순 명창을 찾아가 소리공부를 새롭게 시작했다. 노은주는 예나 지금이나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반듯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성창순 명창도 평소 노은주의 소리 공력이나 성실함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관심을 두고 대했으며 소리공부에 있어서도 이론적 배경과 함께 실습과 시범 등, 정성을 다해 소리 지도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선배 소리꾼 등과 함께‘국악한마당’을 비롯한 유명 공연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의 소리가 좋아 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노은주, 소리뿐 아니라 겸손함과,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매사 반듯한 스승의 태도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노은주는 선생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여의찮아, 그는 매주 서울과 남원을 올라 다니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농선 명창이 강조한 것처럼 아니리나 발림도 중요하나, 판소리는 항상 소리가 중심이어서 그 공력이 묻어나야 한다”라는 가르침, 특히“ 목 재주를 부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은주가 전하는 한농선 명창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 역시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선생님은 방이동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셨어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며‘집이 좁거나 작다’라는 등의 불평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매우 검소하셨고 참으로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때로는 선생님의 속옷을 제가 세탁하려고 하면, 야단을 치셨지요. ‘내 지저분한 옷을 왜 네가 하느냐?’라며 절대로 못 하게 하셨어요. 식사는 소식하셨고, 인근에 있는 돈가스 집이나, 현대백화점의 수타 자장면을 별미로 좋아하셨어요. 가끔 백화점에서 립스틱 사는 것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꾼 노은주가 90년대 중반, 한농선 명창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흥보가>를 배우며 소리와 함께 발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행히 노은주는 어려서부터 가야금과 춤을 배웠기에 발림이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던 고 한농선은 그의 부친이 유명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한성기다. 한 명인은 19세기 말, 산조(散調) 음악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직접 산조를 배운 뒤, 그 가락을 김창조의 손녀딸(국가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를 지낸 김죽파)에게 전수한 거물급 명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하겠다. 아버지 한성기 명인 밑에 한농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은 이미 그의 음악적 인자가, 원인을 이루고 있다는, 곧 근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더욱 그 요인들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서 명인 명창 앞에 젊은 소리꾼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농선 명창은 평소 조용하면서도 깔끔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노은주는 그의 스승, 한농선 명창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노은주에게 처음 소리를 지도해 준 강도근(1918~1996)은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에게 배웠고, 창극단과 지방의 국악원, 특히 1973년 무렵부터 <남원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장기는 ‘제비 후리는 대목’이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그는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는, 순수한 소리꾼으로 70살에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 노은주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강도근 명창을 만나 <백발가>와 판소리 <흥보가> 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은주는 “강도근 선생님 다음으로 남원국악원에 오신 젊은 전인삼 선생에게 배웠는데, 그 분은 소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지도해 주셨지요. 선생과 제자들이 일정기간 산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형태의 수련을 산(山)공부라고 표현하는 데, 젊은 선생님은 공부시간, 연습시간, 휴식시간, 잠자는 시간, 등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지도해 주셨어요. 지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강도근, 전인삼 두 분 남창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전남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목포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 그가 근무하고 있는 <판소리보존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야기, 동 연구회에 참여했던 당시 인물들의 공연물이나 음반들이 이 분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소리꾼, 노은주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소리가 깊고, 공력이 들어있어 인정은 받고 있었으나, 전통과 권위가 있는 대회에서 장관상이나 총리상을 뛰어넘는 수상 경력이 없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위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차, 2024년 7월 목포에서 열렸던 제36회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에 참여했던 그는 심사위원 전원의 만점으로 대상(대통령상)을 받게 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노은주 소리꾼을 명창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해 주고, 이끌어준 분들은 여러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준, 강도근 명창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가 무형유산의 한 종목인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 이건자 명창의 <선녀와 놀량>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학력란’ 메우는 일이 곤혹스러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검정고시 새벽반에 다니며 고입(高入), 대입(大入) 후공부를 한 뒤, 대학원 석ㆍ박사 통합과정까지 수료했다는 이야기, 실기 능력과 학술적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겸손한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 20년 전부터 성북구에 개인 <국악원>을 설립하고, 강습과 강의, 공연 등을 통해 국악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을 소개한다. 그는 <심청가>의 이수자로 자기 소리공부를 하면서 학생들이나 애호가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단법인 한국판소리보존회>의 본부 사무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 7월, 제36회 목포에서 열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10월에는 이를 확인하듯, 네 번째 ‘한농선의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가져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몇 차례 단국대 국악과 동문들이 펼친 음악회와 관련하여 내가 몸담고 있던 당시의 이야기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 전공을 신설하게 된 배경 이야기, 1999년도에는 서울의 한남동 교정으로 이전을 하면서 학과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 및 큰 제자들과 함께 <한국전통음악학회>를 설립하고, 국악학 학술대회의 개최, 학술지 발간,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 활동으로는 미국의 <UCLA>와 공동으로, ‘Korean Music Symposium’을 해마다 개최해 왔으며 여름에는 중국의《연변예술대학》과 정례적인 ‘학술 및 실연(實演)교류회’를 20회 이상 치러 왔다는 이야기, 또한, 2005년도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시행되어 온 <국악분야 예술 강사의 지원사업>의 실행 등도 매우 보람 있는 활동이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대학 당국의 관심과 동료 교수 및 몇몇 졸업생들의 헌신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 졸업생 제자들이 진실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이웃을 섬기는 인품까지 갖추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