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가 <홍문연가(鴻門宴歌)>를 소개하며 그 연회장에서 항장(項莊)이란 장수가 칼춤을 추며 유방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것이 <항장무項莊舞>로 전해온다는 이야기, 한패공은 인품과 신의가 두터워서 장자방이나 번쾌(樊噲)와 같이 목숨을 걸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이야기, 항장무는 조선 후기, 무극(舞劇)의 하나로 무대에 올려졌는데, 이는 평안남도 선천지방의 연희물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공연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교방가요(敎坊歌謠》. 《이왕직아악부기록》들을 통해서 대략적인 절차, 등장인물과 복식, 의물(儀物) 등을 알 수 있으며 음악은 <대취타(大吹)打>가 연주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라는 이야기. 또한 항장무에 출연하는 인물들로는 항우와 우미인을 비롯하여, 패공, 범증, 장량, 항장, 항백, 번쾌, 그리고 집사와 기수(旗手), 세악수(細樂手), 취고수(吹鼓手)등 등이 등장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남도(南道)의 단가(短歌)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여기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인천(仁川)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도 소리꾼, 유춘랑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정치를 하며 신하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 하고 일을 처리함에 신중히 하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보아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론 끝에 결론에 이루지 못하는 경우다. 이때 몇 가지 대안이 나올 것이다. 다시 생각하여 훗날 재론하든가 아니면 그 안건을 일정기간 연기하든가 아니면 파기하든가 일 것이다. 먼저 ‘여경상량’을 실록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횟수는 아니나 세종 때 8번 나와 빈도수로는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세종실록>에 보이는 내용의 개요를 보자. 1. 세종 7년 5월 14일: “장리 최맹온의 부정을 징계하자는 집의 김타 등의 상소문이다.” 2. 세종 7년 6월 2일: “좌의정 이원 등과 관리의 승급·수령 파면의 일을 의논하다.” 3. 세종 10년 5월 26일: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4. 세종 11년1월 4일: “중국 황제가 구하는 석등잔의 헌납 방법과 학문진흥책을 의논하다.” 5. 세종 12년 8월 13일: “현재 강경법의 《육전》에 기재를 허락지 않는다.” 6. 세종 14년 3월 15일: “상장소 제조 맹사성ㆍ권진ㆍ허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항우의 부하인 항장(項莊)이 칼춤을 추며 유방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유방의 부하, 장자방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홍문연가>라는 단가의 노랫말에서 항우를 향해, “은혜를 망각하는 배은(背恩)이라든가, 또는‘망의(忘義)“라고 하는 배경도 알고 보면, 유방과의 경쟁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비판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항우가 그의 부하를 통해 유방을 죽이려 했던 연회에서 유방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건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람 됨됨이, 곧 인품과 신의가 두터워서 목숨을 걸고 유방을 따르는 충성심 강한 부하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는 특히 장자방의 역할이 커서 근거리에서 유방을 지켜주었고, 번쾌(樊噲)의 존재도 한몫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홍문연가>라는 노래 속에는 잔치에 모인 무인들의 이름이 일일이 열거되지 않은 채, 주로 그들의 옷차림을 엮어 살벌한 분위기만을 띄우고 있어 아쉽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장수로는 나이 70살에 항우의 모사가 되어, 홍문연회에서 패공을 죽이도록 권한 범증(范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