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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창은 시절가 , 또는 시절단가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41]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시조의 학습을 위해서는 쉬운 악보의 제작, 지도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내포제 시조의 확산을 위해서는 도내(道內)공직자들과 교사들을 동호인으로 안내해야 하며, 국내외 방문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동 보존회는 이제까지 추진해 온 발표회, 경연대회, 강습회 등을 꾸준히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당부의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주에는 시조음악에 관한 일반 상식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래 시조, 또는 시조창은 <시절가>, <단가>, <시절단가>라는 명칭으로 불러온 노래였다. 시조는 조선조 영조 무렵,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石北集)》 관서악부에 보이는 시구(詩句, 곧 “ 일반 시조에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李世春)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악보는 순조 때,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유예지(遊藝志)편에 전하는 시조 악보라는 점에서 200여년을 헤아린다. 이 악보를 해독하여 세상에 알린 장사훈 교수는 이 시조가 현행 경제(京制)의 평시조라는 점을 밝혔으며, 그 이후 평시조는 가곡의 다양한

전쟁이 나기 전 온천행을 한 세종

북방지역 정비와 김종서- ③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때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그러기에 평시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첩보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정보전의 모습이었다. 세종의 업적은 여럿 있지만, 훈민정음[한글] 창제 이외에 여진족 토벌을 통하여 대규모 백성을 이주시킨 사민입거(徙民入居) 그리고 압록강 인근의 4군과 두만강 인근의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을 확장한 일도 있다. 파저강 1차 전투 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ㆍ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사람을 살상하고, 소와 말, 재물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野人征伐)은 1, 2차로 행해졌다. 1차 정벌은 세종 15년(1433) 4월 10일에 압록강 중류지방의 여진인을 정벌하게 되었다. 정벌군의 총사령관에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 명과 황해도 군마 5,000필을 징발해 모두 2만 명의 군대를 4월 10일 강계부에서 7대로 나누어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248명,

일본인들의 한국어 사랑 50년, 아사히신문에 소개

재일동포 김희로 사건을 알게 되면서 ‘현대어학숙(現代語學塾)’ 창립 [맛있는 일본이야기 617]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인 구라하시 요코(倉橋葉子, 71)씨로부터 신문 기사 한 장이 카톡으로 날아왔다. 어제(7일) 석간 아사히신문이었다. 기사 내용은 50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일본인 기사였다. 이 기사는 6일(월)과 7일(화)에 걸쳐 2회로 연재했는데 구라하시 씨가 보낸 것은 2회차였다. 50년 전에 한글 교실을? 그렇다. 이날 기사는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와 그들이 현재 지속하고 있는 일을 두 팀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었다. 한 팀은 한국어를 배워 현재 한국의 소설가 황석영 씨의 수필을 읽고 있는 팀이고, 다른 한 팀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도하는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61) 씨 이야기다. 이들은 1970년부터 ‘현대어학숙(現代語學塾)’이라는 한국어교실을 만들어 꾸준히 한국어 실력을 쌓아 왔다. 한국어교실은 김희로공판대책위원회가 사무실로 쓰기 위해 빌린 도쿄 요요기역 근처의 사무실이었다. 이들이 한국어교실 문을 연 계기는 1968년 재일동포 김희로 사건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김희로는 가난한 집안형편과 일본사회의 차별과 천대를 겪어내면서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세상에서 주

오늘은 포도순절이 시작되는 절기 ‘백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68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열다섯째 절기인 ‘백로(白露’)입니다. 이때쯤이면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지요. 원래 이 무렵은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때지요.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이 12만 섬(1998년 기준)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가을장마 탓으로 농민들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이때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백로에서 추석까지 시절을 포도순절이라 했지요. 그 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의미이고, 조선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어떤 어른들은 처녀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지요.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개탄을 합니다.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시조창은 배우기 쉽고 간단한 노래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4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시조창의 확산화 운동은 젊은 층, 그 가운데서도 초, 중등학교 학생들을 애호가층으로 확보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어린 학생들은 시조를 통해 느림의 철학을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기 위해서는 교재의 제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현재의 시조창 교재들은 정간, 오선, 그림 악보 등 다양하나, 음높이와 박자, 노랫말 등의 구분이 불분명함으로 더욱 정확한 기보방법을 통해 악보의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학습자의 음악수준이나 단계별 난이도를 고려해서 새로운 시조창 악보를 제작하는 작업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대부분 애호가들은 악보를 익히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하소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랫말의 표기 위치와 음고(音高) 표시와 박자의 한배 표기가 불분명하여서 더욱 정확하고 분명한 기보체계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 다음 표현방법으로 요성(搖聲), 곧 떠는 소리, 흘려내리는 퇴성(退聲), 밀어 올리는 추성(推聲) 등 다양한 표현법이 첨가되어야 한다. 악보의 제작은 신중하게 여러 가지 요건들을 고려해서 제작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별도의 기회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해야

[맛있는 일본 이야기 616]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23년 9월 1일 낮 11시, 일본 관동지방(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 군마, 도치기, 이바라기, 치바현)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를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간토다이신사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관동대지진’이라 부른다. 문제는 이 대지진 때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관동지방에 체재하던 조선인들은 일제의 조직적인 ‘조선인 학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지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명목으로 도쿄ㆍ가나가와ㆍ사이타마ㆍ치바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들은 ‘조선인 폭동’에 대한 전문(電文)을 준비해 9월 2일 오후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과 조선총독부ㆍ타이완총독부에 타전했다. 전문 내용을 보면 “동경 부근의 대지진을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 : 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동

시조창을 어린이들의 친구로 만들자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39]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내포제시조 보존회>가 7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단체라는 점, 부여읍에 한옥 건물의 회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내포제시조의 전승활동, 강습 및 발표회, 전국규모의 경창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는 점, 앞으로의 발전방향으로는 첫째, 내포제 시조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식시켜서 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야 한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보존회에 기대하는 발전방향의 제안은 하나둘이 아니다. 지역민들에게 시조의 값어치를 인식시켜 자긍심을 심는 일, 그다음 주문은 젊은이들을 애호가층으로 확보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가 변해서인가?’, ‘느린 형태의 노래를 꺼려서인가?’ 가곡이나 가사, 시조창과 같은 전통의 노래들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젊은 층이 그러해서 이들을 시조나 가곡의 애호가로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어린이들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시조를 지도하는 일은 정책적으로 접근해야만 가능할 정도이다. 누구는 “어린이들에게 빠르고 발랄한 노래를 지도해야지, 왜 노인층이 즐기는 가곡이나 시조를 지도해야 하는가?”라고 그럴듯한 항변을 내놓기도 한다. 어린이들에게 시

상을 치르게 해달라는 김종서 청을 거절하다

북방지역 정비와 김종서-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큰 전투 가운데 하나로 파저강 전투가 있었다. 당시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평소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바로 첩보를 이용한 전투가 활용되게 되었다. 세종 때 북방을 총괄한 장군 중에 김종서(1383~1453)가 있다. 부친은 무과 출신이나 그는 몸이 왜소하고 책을 좋아하고 시문을 가까이해 16살 되던 태종 5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현장에서의 김종서는 세종초 이전부터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벌도 받다가 세종 즉위년 11월 강원도 주민의 토지 감사에 대한 불만을 현지에 가서 조사하고 기민(饑民) 729명의 조세를 면제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변계량이 조세를 감면해 주는 일은 “가난하여 조세를 면제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그리되면 국고가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