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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고운의 문장 속 차를 다시 읽는 까닭

고운 최치원의 차와 문필이야기
[라석의 차와 시서화] 6

[우리문화신문=손병철]  고운 최치원은 흔히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자 입당 급제의 수재, 그리고 귀국 뒤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혀 은둔의 길로 들어선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삶과 글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늘 ‘차’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는 고운에게 단지 갈증을 푸는 음료가 아니라, 시와 문장을 맑히고 마음을 씻는 수양의 매개였으며, 차와 시서의 풍류가 한데 어우러지는 문인적 삶의 일상적 토대였다.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며 대륙의 중원에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격문으로 알려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당대에 “천하의 문장이 번개처럼 떨어졌다”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명문장으로 회자된다. 그 기세와 문장은 젊은 천재의 빛나는 성공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 문장 속에는 전란과 혼란을 직시하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시기의 고운은 칼날 같은 문장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귀국 뒤의 삶은 달랐다. 신라 조정의 혼탁한 정치 현실 속에서 그의 개혁적 이상은 번번이 좌절되었고, 경남 일대의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도 세도와 문벌의 장벽은 그를 밀어냈다. 함양에 남아 전해지는 천년숲 상림(上林)공원은, 고운이 태수라는 관직의 번다함 속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사유하고 백성의 쉼을 도모하려 했던 문인의 면모를 전해 준다. 정치를 넘어 삶의 공간을 가꾸려 한 그 시도는, 차를 달여 벗과 나누던 고운의 풍류와도 통한다.

 

 

그의 《계원필경집》에 남아 있는 차에 관한 글을 보면, 고운의 일상적 수양이 더욱 생생히 드러난다. 새 차를 받았을 때 그는 차의 산지와 향, 달이는 법과 잔의 기품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묘사하며, 선승이나 도인을 맞아 고요히 마시는 장면을 그린다. 차는 고운에게 마음을 맑히는 의식이자, 시를 낳는 물이었고, 붓끝의 번뇌를 씻는 한 모금의 휴식이었다. 또한 사신선이 바다를 건너왔을 때 차와 약재를 함께 구해 집으로 보내려 했다는 대목은, 차가 이미 당대 생활 속에서 건강과 치유의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만년의 고운은 세속의 벼슬을 버리고 산천을 유랑하며 은둔의 길로 접어든다. 해인사 일대에 전해지는 ‘고운이 짚고 다니던 소나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라는 전설, 그리고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가 현실 정치의 번뇌를 벗고 자연과 도의 세계로 귀의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민간의 기억일 것이다. 사산(四山, 사면에 둘러 있는 산들) 비문에 담긴 고승들의 삶을 기리는 문장 속 ‘진실을 지키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태도’는, 곧 고운 자신 삶의 방향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고운 최치원의 삶은 입당 급제의 찬란한 성공, 토황소격문의 문명(文名), 귀국 뒤의 좌절과 은둔, 그리고 신선 설화로 이어지는 한 편의 장대한 서사다. 그 서사의 사이사이를 잇는 조용한 실마리가 바로 차다. 차는 전란의 격문을 쓰던 젊은 날의 심장을 식히고, 관직의 번다함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산천을 떠돌던 만년의 고독을 따뜻하게 데웠을 것이다.

 

고운에게 차는 시를 낳는 물이요, 문장을 맑히는 향이며, 붓끝의 고단함을 씻는 한 모금의 쉼이다. 차를 달이는 솥과 잔은 곧 시서의 작업대가 되고, 그 위에 피어오르는 김과 거품은 무상 속에서도 맑음을 지키려는 문인의 마음을 비춘다. 오늘 우리가 고운의 문장 속 차를 다시 읽는 까닭은, 한 잔의 차와 시서의 필묵이 한자리에 어우러지는 동아시아 문인의 태도임을 새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신의주가 바라보이는 단동에서 라석)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