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먼바다를 건너온 것은 한 사람의 운명만이 아니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출발하여 중국 남쪽땅 복주를 거쳐 서기 48년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 공주는 낯선 땅에 새로운 문화를 함께 들여왔다. 기록은 그녀의 혼인과 여정을 전할 뿐, 그녀의 손에 무엇이 더 들려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작고 조용한 하나의 씨앗이 살아 있다. 그것은 차(茶)의 씨앗이다.
나는 오래전, 그 장면을 이렇게 졸시집 《허황옥이 가락국에 온 까닭》에 적어 두었다. “옥합에 넣어 온 / 귀한 차씨를 급히 꺼내 / 대숲 오솔길을 지나 / 이슬 젖은 땅에 심었다.” 기록이 침묵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시와 기억이다. 그 씨앗은 한 이국 여인의 손을 떠나 이 땅의 흙으로 스며들었고, 이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쉬기 시작했다.
가락국의 차문화는 단순한 전설에 머물지 않는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거등왕 때의 제례 기록이 전한다. 떡과 밥, 과일 그리고 술과 더불어 차가 함께 올려졌다는 내용이다(거등왕 3년, 199년 이후 제례 규정). 이는 이미 2세기 무렵 가야에서 차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제의와 정신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말해 준다. 신라ㆍ고구려ㆍ백제보다 이른 시기에 차가 의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락국의 차는 우리 차문화의 가장 깊은 뿌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씨앗이 뿌리내린 곳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바로 김해와 창원 북면 일대, 그리고 백월산 기슭이다. 그곳에는 지금도 ‘죽로차(竹露茶)’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대숲 아래 맺힌 이슬을 머금고 자라는 차’라는 뜻이다. 이름만으로도 이미 한 편의 시와 같다. 지금은 하동 지리산 기슭까지 죽로차 이름이 퍼졌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이 차가 바로 허황옥이 가져온 씨앗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록 정사에 명확히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전승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지역의 삶과 기억 속에서 길게 이어져 온 또 하나의 역사다.
땅의 이름 또한 그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다호리(茶戶里), 다곡(茶谷), 차밭골과 같은 지명은 그곳에서 차가 자라고, 거두고, 마셔지고, 올려졌던 시간을 조용히 증언한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작은 잔과 가야토기들 역시 단순한 생활용기를 넘어, 차를 담고 나누던 온기의 흔적으로 읽힌다. 이처럼 가락국의 차는 문헌과 전설, 지명과 유물 속에 겹겹이 스며들어 하나의 문화적 층위를 이루고 있다.
차는 언제나 길을 먼저 아는 존재였다. 먼 나라에서 시작된 한 알의 씨앗이 바다를 건너와 낯선 땅에 뿌리 내리고, 세월을 따라 숲이 되고, 다시 사람의 손으로 돌아와 따뜻한 한 잔이 되는 과정은 단순한 식물의 이동이 아니라 문화의 순환이며 마음의 전이였다. 나는 그 흐름을 또 이렇게 적어 두었다. “향기로운 발걸음을 옮겨 / 길짐승 날짐승 파헤칠까 / 나뭇가지 덮어 숨겼다.” 숨겨진 것은 씨앗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가락국의 차는 기록보다 먼저 있었고, 전설보다 깊이 남아 있으며, 역사보다 오래 흐른다. 신라의 다례와 고려의 다풍, 조선의 차례보다 앞서 이미 이 땅에는 대숲 이슬을 머금은 한 잔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첫 잔을 건넨 이는 먼 나라에서 온 한 여인이었고, 그 잔을 이어온 것은 이 땅의 사람들과 바람, 그리고 세월이었다.
차는 결국 한 나라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숨결이다. 그리고 그 숨결은 지금도 대숲 사이 이슬로 맺혀,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3. 10. 북경에서)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