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옛시는 강하다. 짧으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조용히 읊조리다 보면 굳었던 마음이 풀어지고, 옛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마력이 있다. 이런 매력에 빠져 오늘날에도 시읽기를 즐기고, 때에 맞게 인용하는 경영자가 많다. 고두현이 쓴 이 책, 《옛시 읽는 CEO》는 경영자가 읽고 그 참뜻을 되새길 만한 옛시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느낌에 맞게 분류하여 엮어낸 책이다. 옛시에 얽힌 이야기와 더불어 난감한 위기에 처했을 때, 시 한 수를 인용하여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전한 사례 등을 풍부하게 담았다. 말이 범람하는 시대, 옛시에 담긴 따뜻하고도 여백 있는 감성은 가슴을 울릴 때가 많다. ‘조선의 이태백’이라 불렸던 이안눌이 함경도 관찰사 시절, 눈이 천 길이나 쌓인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며 쓴 「따뜻한 편지」에는 힘든 일이 있어도 차마 부모님이 걱정할까 전하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p.33) <따뜻한 편지>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흰머리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북녘 산에 쌓인 눈 천 길인데도 올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 이안눌 지은이 고두현은 자식이 어버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엘리자베스 키스. 1919년 처음 한국을 찾은 뒤 한국의 여러 가지 풍속과 사람을 그린 화가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근무하는 언니 부부를 따라 일본에 왔다가 동양에 매혹되어 머물렀다. 그 뒤 언니 제시와 함께 1919년 3월 28일, 조선에 와서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렇게 그린 그림을 1946년 《올드 코리아》라는 책으로 펴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은 색동옷을 입고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 좁은 방에 마주 앉아 학문을 논하는 노인들, 추운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남바위 등 1900년대 초 한국의 모습을 따뜻하면서도 정교하게 담아내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배유안이 쓴 이 책,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를 보면 경성시대 한국의 모습이 한층 정겹게 느껴진다. 물론 식민지배 치하의 엄혹한 시대, 사는 것이 신산하다고 고달팠을 테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무심히 흘러갔던 것 같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정겨운 사람들’, ‘마음에 남는 풍속들’, ‘아름다운 사람들’, ‘기억하고 싶은 풍경들’의 네 가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어떤 모습을 그리든 따뜻하고 애정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은 철저한 ‘사농공상’의 나라였다. 벼슬하는 선비가 으뜸이었고 물건을 만드는 ‘장이’들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사회 분위기는 조선의 발전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전문성으로 꽃을 피운 이들이 있었다. 이수광이 쓴 이 책, 《조선의 프로페셔널》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명인들은 자신이 ‘꽂힌’ 한 가지 분야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어찌 보면 사회적 인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원하는 일에 푹 빠지는 것이 진정한 명인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자신의 열정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던 장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에서 황기와를 처음으로 구웠던 역관 방의남의 이야기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대궐의 중건에 나섰고, 이에 기와를 굽는 와장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대궐의 기와를 청기와나 황기와로 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p.177-178) “대궐을 중건할 때 청기와나 황기와를 사용하도록 하라.” 광해군은 대궐을 중건하면서 새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4) 금년에 낙백(시험에 떨어지니) 하니 나그네 마음 놀라워 외로운 객관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네 계룡산 짙은 구름은 푸른색 묻어 버리고 금강의 높은 물결은 차가운 소리 으르렁 저무는 하늘 비바람에 돌아갈 길 캄캄하구나 과거에 떨어지고 돌아갈 면목이 없는 선비의 비참한 심경이 절절히 느껴진다. 이 책에 나오는 김득신이 쉰넷의 나이에 또다시 과거에 낙방하고 상심한 마음으로 쓴 시다. 그는 쓰린 마음을 안고 돌아가, 다시 과거 시험에 도전해 결국 쉰아홉 살에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집안마다 가풍이 있듯이, 공부하는 분위기도 집집마다 다르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은 모두 공부를 중요시하는 가풍이 있었지만, 어떤 점을 중히 여기는지는 조금씩 달랐다. 최효찬이 쓴 이 책, 《세계 명문가의 공부 습관》은 뛰어난 학자와 관료를 배출한 동서양의 가문들이 어떻게 자녀 교육을 했는지 보여준다. 우리 명문가를 다룬 1부에서는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서애 류성룡, 청장관 이덕무, 백곡 김득신을 다루고, 세계 명문가를 다룬 2부에서는 찰스 다윈, 마리 퀴리, 타고르, 발렌베리, 로스차일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퇴계 이황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차별은 참 서럽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이 조금 더 따뜻했다면 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일들이 차별에 가로막힌다. 지금이야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없고 성별에 따른 차별도 거의 없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신분계층과 남녀에 따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차별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차별에 가로막히면, 포기한다. ‘그냥 이번 생은 그러려니’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도 그랬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차별의 벽 앞에서 절망하고 꿈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때도 꿋꿋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차별 때문에 꿈을 이루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고 꿈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꿈을 이루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김은빈이 쓴 이 책, 《차별을 뛰어넘은 조선 영웅들》에 나오는 여섯 명의 위인이 그 주인공이다. 차별에 허덕이다 귀인을 만나고, 천운을 만나 꿈을 이뤘다.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기도 기회가 되고, 무심코 지나칠 일도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1480년 무렵, 한양에 반석평이라는 소년이 살았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 참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출구전략. 어떤 상황에서 빠져나갈 때 쓰는 전략이다. 전진보다 후퇴가 더 어려울 때가 있듯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무사히 탈출하기는 무척 어렵다. 특히 양자관계가 아니라 셋 이상이 얽힌 다자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조선, 명, 일본이 전쟁을 벌인 임진왜란이 그런 상황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며 어차피 확실한 승부를 내기는 어려워졌다. 남은 것은 서로 적당히 체면을 지키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 강화 협상이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연구교수인 김경태가 쓴 이 책, 《허세와 타협: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은 이런 딜레마에 처했던 세 나라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준다. 협상에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허세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있는 척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허세만 부릴 수는 없다. 결국 타협을 해야 한다.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래는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넘어오지 않았고, 현장에 있는 장수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2018년, 향년 82살로 별세한 황병기 명인은 한국 가야금계의 독보적인 장인으로, 대표작 ‘미궁’을 비롯해 신라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등 많은 실험적인 곡을 작곡해 가야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런 그가 가장 아끼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논어》다. 여러 가지 번역서를 참고해서 《논어》를 정독하고, 보석처럼 마음에 새길 말씀만 100문장을 모아 그만의 ‘논어 명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외출할 때 품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다. 이 책은 논어 명문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곁들여 쓴 수필 모음집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황병기 명인을 만든 철학의 팔 할이 《논어》라는 생각이 든다. 거장에게는 항상 그의 삶과 작품을 추동하는 철학이 있다. 그는 《논어》를 통해 언행을 정제했고, 늘 수양하며 구도하듯 음악을 했다. (p.158)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위정>편 11장-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작정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옛것을 충분히 익힌 후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옛것을 모르고 새로운 것만 좇으면 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황병기 명인의 여정 또한 그랬다. 19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 공자의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 이 구절이 바로 《징비록》을 쓴 이유이다. 징계할 징(徵). 삼갈 비(毖). 부끄러운 잘못을 스스로 꾸짖고 앞으로 삼갈 바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승리를 복기하기는 쉬워도, 패배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특히 한 나라의 정승으로, 임금 다음으로 그 패전에 책임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징비록》을 쓴 유성룡의 ‘책임지는 용기’가 대단한 까닭이다. 최지운이 쓴 이 책, 《책임지는 용기, 징비록》은 망국이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시기, 전쟁을 총지휘하며 이끌었던 한 재상의 ‘전쟁회고록’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전후 사정뿐만 아니라, 최고위급 관료가 아니라면 알기 힘든 세세한 일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훗날 숙종은 책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기도 했다. 전쟁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던 유성룡은 모든 사건을 보고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누구보다 전쟁에 대해 총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을 가장 높은 시점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런 인물이 붓을 들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류(韓流). 우리 문화가 파도처럼 흘러가 세계를 매료시키는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음악, 그리고 이제는 소설까지, 전 세계로 퍼져나간 우리 문화는 현지에서 변주를 거듭하며 문화 다양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이 옛날에도 있었을까? 물론이다. 그것도 상당히 먼 옛날에 말이다. 바로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한 아직기와 왕인이 그 처음이다. 이들 덕분에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일찍이 왜는 백제와 가까이 지내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백제 근초고왕은 왜왕에게 ‘칠지도’라는 칼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런 교류의 연장선에서 백제에서 학문으로 이름 높던 박사였던 아직기는 임금의 명으로 왜로 파견되었다. 아직기를 왜로 보낸 임금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근초고왕이나 근수구왕, 아신왕 가운데 아신왕이 가장 유력한 설로 인정받고 있다. 아신왕 때 왜와 교류가 무척 활발했기 때문이다. 아직기는 말 두 필과 칼, 거울을 가지고 왜로 건너갔다. 왜왕에게 말 타는 법과 기르는 법을, 토도치랑자 왕자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건너가 토도치랑자 왕자와 왜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안종약. 이 이름은 아마 모두에게 퍽 낯설 것이다. 안종약은 조선 초부터 인조 임금 때까지의 신비로운 야사(野史)나 일화를 모아 놓은 《대동야승》에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한’ 선비로 실려있는 인물이다. 지금도 귀신 이야기는 지나가던 사람까지 솔깃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란 감정에 끌리는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적인’ 일상에, 비현실성을 지닌 비일상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숨통을 틔워주기도 한다. 박민호가 쓴 이 책,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안종약》은 《대동야승》에 실린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한 안종약’이라는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편집한 책이다. 《대동야승》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쓴 책을 모아 놓은 책 모음으로, 안종약 이야기는 그 가운데 《용재총화》에 실려있다. 《용재총화》는 조선 시대 학자 용재 성현이 지은 책인데, 민간 풍속이나 역사, 지리, 종교, 음악 등 문화 전반을 다룬다. 유명인들의 일화나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아 당대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안종약은 학문이 높아 행동이 떳떳하고 남한테 정직했고, 덕은 깊어 마음이 깨끗하고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