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44)
1897년, 그녀는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마르다(Marth, 瑪多)’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마르다!”
커틀러가 그녀를 불렀습니다.
“…….”
그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신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김마르다!”
그날부터 그녀는 김마르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김마르다.
우리나라 첫 간호사의 이름이다. 그녀는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코와 손가락을 베인 아픈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근대 의료기관 ‘보구여관’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간호사’라는 천직을 만났다.
한봉지가 쓴 이 책,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김마르다》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김마르다’라는 여성의 인생을 담담히 서술한 책이다. 그녀가 겪었던 아픔과 고통, 슬픔이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승화되고, 또 가정폭력의 희생자로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던 그녀가 점차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자신감을 되찾아가는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그녀가 ‘보구여관’을 찾아간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보구여관은 말 그대로 여성 환자를 ‘보호하고 구원한다’라는 뜻이었다. 1884년 4월 서울 정동 이화학당에 여성의원이 설립되자 명성황후는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메타 하워드, 로제타 셔우드 홀 등 서양 여성의원들이 원장을 맡았다.
서양 여성이 진료하는 의원은 당시 부녀자들에게도 미심쩍은 ‘신문물’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보구여관을 찾은 그녀는 따뜻한 진료를 받고 비로소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보구여관의 배려로 1년 동안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거들며 지내다, 워낙 일하는 솜씨가 좋자, 보구여관의 의원 커틀러는 간호사가 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김마르다는 손가락도 없고, 코도 없고, 까막눈인 자신 같은 사람은 감히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했다.
(p.48-49)
“조선의 건강은 조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셔우드 원장이 김마르다를 쏘아보았습니다.
“……”
김마르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커틀러처럼, 셔우드 원장처럼, 어떤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맡길 건가요?”
“아니요!”
김마르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울리는 사명감에 귀 기울여 마침내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한글 읽기와 쓰기도 배웠고, 병원 바로 옆에 있던 정동교회를 다니며 예배도 드렸다. 이름이 없던 그녀가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가지게 된 이름이 ‘김마르다’였다.
김마르다는 8년 동안 보구여관에서 간호부터 빨래, 청소, 밥 짓기까지 온갖 일을 했다. 이에 미시간대에서 간호대를 졸업하고 조선에 온 간호사였던 에드먼즈는 보구여관에서 세운 간호원양성학교의 첫 학생으로 김마르다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p.53)
“제가요?”
“조선에서 첫 간호사로 당신만 한 인물이 없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조선을 위해, 조선의 여성을 위해 잘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1903년 12월 세워진 한국 첫 간호사 교육기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는 간호교육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고, 여성들이 당당하게 전문 직업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국어 이름 ‘간호원’을 만들고, 첫 한글 《간호 교과서》를 뒤쳐서 펴내고, 간호복 디자인도 개발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간호원양성학교에 온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여성이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 관습이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고, 간호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크지 않았던 까닭이다. 첫 입학생은 4명으로, 김마르다, 이그레이스, 김엘렌, 정매티였다.
1906년 1월 20일, 보구여관 진료소 대기실을 예모식(간호사의 상징인 모자를 수여받는 의식) 장소로 꾸며 많은 외국인이 초대되었다. 간호사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가 예모를 받아 남성 의복의 상징이던 모자를 쓰는 영광을 안았다.
1912년, 서울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가 평양에 있는 광혜여원으로 이전해 김마르다도 같이 옮기게 되었다. 간호사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한 여성이 어느덧 보구여관의 수간호원이 되고, 또 광혜여원에서 간호 활동을 벌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녀의 말년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인생이 보구여관을 만난 뒤로 훨씬 더 행복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 말 여성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어쩌다 있어도 섭섭이, 끝순이, 종말이 등 아들을 낳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이름이 대다수였다. 이름조차 없을 정도이니 사회활동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김마르다는 이런 시대에 이름을 갖고, 또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어엿한 신여성이었다.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아픈 개인사를 딛고, 자신의 운명을 당당히 개척한 김마르다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나라 초기 의료시설 역사도 함께 알 수 있어 더욱 유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