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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차, 한반도에서 제도와 의식으로 꽃피어

고려 전기부터 관청 다방(茶房)이 있었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10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고려의 차는 더 이상 바다와 대륙을 건너온 흔적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질서로 완성된 문화 형상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지나온 차가 고려에 이르면, 그것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제도와 의식, 그리고 삶의 리듬 속에 깊이 자리 잡는다. 백제의 차가 바다를 건너 타지에서 더욱 또렷해졌다면, 고려의 차는 오히려 이 땅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다방(茶房)이 있다. 고려 전기부터 설치된 이 관청은 궁중의 차 의례를 맡아 나라 행사마다 차를 준비하고 올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원회(元會)와 같은 국가적 대의례는 물론, 왕비 책봉과 태자 책립, 공주의 혼례와 원자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차는 빠지지 않았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국가 질서를 맑히는 예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에는 분명한 의미의 다례(茶禮)가 존재하였다. 비록 후대 조선처럼 ‘다례’라는 이름이 엄밀하게 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폭넓고 깊은 차 의식이 국가와 불교의식 전반에 걸쳐 시행되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차를 내리고, 신하가 다시 차를 올리는 과정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질서와 공경의 흐름을 구현하는 의례였다. 또한 불교 절에서는 차를 공양으로 올리는 헌다(獻茶)가 일상적 수행의 일부로 자리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차 문화는 이름 이전에 이미 완성된 다례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기록 속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사람들이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며, 궁중에서는 은제 화로와 비색(翡色)의 작은 찻잔을 사용하고, 뜰 한가운데서 차를 끓여 연잎 모양의 뚜껑을 덮어 올린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차가 단순한 생활 습속을 넘어, 형식과 미감을 갖춘 궁정문화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고려의 차는 손끝의 공력을 요구하는 문화였다. 성종(成宗)이 불공을 드리며 차를 직접 갈았다는 기록, 그리고 이를 만류한 최승로(崔承老)의 일화는 차가 단순한 음용물이 아니라 정성과 노동이 결합한 수행 행위였음을 잘 말해 준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가루차, 곧 말차(抹茶)가 성행하였고, 이를 위한 다마(茶磨, 찻잎을 가는 맷돌)가 널리 사용되었다. 일본 말차의 기원은 고려에 있었다. 문인 이인로(李仁老)와 이규보(李奎報)의 기록에도 이러한 차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문인 김부식(金富軾)은 또 다른 결을 보여 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펴낸이로 널리 알려진 그는 직접적으로 차를 읊은 시는 많지 않으나, 「제송도감로사차혜원운(題松都甘露寺次惠遠韻)」과 같은 작품에서 송도(松都)의 산수와 절의 맑은 기운을 노래한다. 그 시 속의 공간은 차가 가장 잘 살아 숨 쉬는 자리며, 차가 지향하는 정신적 맑음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는 차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차의 세계를 드러낸 문인이었다.

 

고려의 차는 공간적으로도 넓게 퍼져 있었다. 개경(開京)은 그 중심이었으며, 국제 무역항 벽란도(碧瀾渡)를 통해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고려와 송의 교역은 10세기 이후 꾸준히 이어졌고, 수많은 상인과 사신이 이 항구를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차와 다구, 그리고 차를 마시는 방식이 함께 오갔으며,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의 다구가 중국의 양식을 참고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고려청자의 미감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평양, 곧 서경(西京) 역시 중요한 무대였다. 팔관회가 개경뿐 아니라 서경에서도 열렸다는 기록은, 차 의식 또한 이 지역에서 함께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비록 개경처럼 세밀한 다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가적 불교 의례가 시행된 공간에서 차가 빠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서경의 차는 기록보다 의식 속에서 살아 있었던 셈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생산의 기반이다. 고려에는 다소(茶所)라는 특수 행정 구역이 존재하여 차를 생산하고 공물로 바쳤다. 이는 차가 단순한 소비품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연결된 자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차는 자연에서 자라났으나, 동시에 제도 속에서 관리되고 유통되었다.

 

이 모든 흐름을 따라가면 하나의 사실이 또렷해진다. 고려의 차는 외부에서 옮겨온 문화가 아니라, 이 땅에서 스스로 완성된 하나의 문명적 형식이었다는 점이다. 절에서는 수행과 공양의 형식으로, 궁중에서는 예와 질서의 매개로, 항구에서는 교류와 확장의 통로로 기능하였다. 차는 잎이지만, 동시에 시간이었다. 갈아지고, 끓여지고, 올려지고, 나누어지는 그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과 사회의 질서가 함께 다듬어졌다.

 

고려의 차는 그렇게 보이는 의식과 보이지 않는 정신을 하나로 엮어냈다. 바다나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머물며 완성된 것이다. 고려의 차는 그 자리에서 깊어졌다. 절의 뜰과 궁중의 전각, 그리고 바닷바람 스치는 항구 사이에서. 그리고 지금도, 어느 오래된 절의 마루에 앉아 찻물을 올리는 순간, 그 오래된 형식은 다시 살아난다. 아직 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방(茶房)'의 역사도 오랜 전통임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차는 그렇게, 말없이 이어진다. (북경 송장-宋莊에서)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