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8 (금)

  • 흐림동두천 29.3℃
  • 흐림강릉 30.6℃
  • 흐림서울 32.3℃
  • 구름많음대전 30.7℃
  • 구름조금대구 32.7℃
  • 구름많음울산 30.7℃
  • 구름조금광주 31.8℃
  • 맑음부산 32.0℃
  • 구름조금고창 32.7℃
  • 구름조금제주 31.6℃
  • 흐림강화 30.0℃
  • 흐림보은 29.2℃
  • 구름많음금산 31.4℃
  • 구름조금강진군 31.5℃
  • 맑음경주시 32.0℃
  • 맑음거제 3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금주성 포위에 동원된 조선 조총부대 1,500명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6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5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3일(수요일), 이동 거리 340km

숙박 : 진황도아각호텔(秦皇岛雅阁酒店, 0335-341-7777)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하는 의무려산

 

선대 회장인 이형석 박사는 《고조선 강역 연구》에서 “의무려산(医巫闾山)을 장백산, 천산과 더불어 동북지역 3대 명산으로, 도교와 불교의 도량입니다. 중국 황실이 수천 년 동안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천의 산으로, 의(醫)와 무(巫), 려(閭)로서 '치료하다'와 '무당', ‘마을의 문’의 뜻이며 만주어로는 '크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합치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이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열하일기》에는 광개토대왕비 거란 정벌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는데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에서 3 마을과 6, 7백 영을 격파하였는데 부산을 의무려산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 답사로 석병대(石屏代) 망해사(望海寺)에 올라 멀리 발해를 바라보니 온 세상에 봄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고 온화한 기운이 신령화 하여 저절로 치유되는 것 같았습니다. 연암은 1780년 7월 17일 배로 대릉하와 소릉하를 건넜다고 하니, 버스에서 바라보니 강폭이 상당히 넓어 보였습니다.

 

 

 

 

조선군 파병의 아픈 역사를 품다

 

명나라의 제 일 저지선인 ‘금주고성(锦州古城)’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명나라 성으로, 현재 복원된 남문만 남아있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격전지자, 조선군이 파견된 아픈 역사의 장소로, 1640년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 인조 19년(1641년) 조선은 조총부대 1,50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군과 함께, 명나라 금주성 포위에 동원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성경(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를 참전시켜 조선군의 이탈이나 조선의 배후 공격을 미리 방지하려 했습니다.

 

《인조실록》 인조 19년 9월 7일에는 이 전투에서 사망한 한병(漢兵)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 탄환에 맞은 자가 10명 가운데 7~8명이나 되었으며, 이때부터 한인(漢人)이 우리에 대한 유감이 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해 배운 조선군의 조총 사격 실력이 백발백중임을 보여줍니다. 연암은 “아아, 이곳이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던 터전이구나. 슬프다! 이곳은 명나라와 청나라 군사들이 격전하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다.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난리의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그때의 장렬한 격전의 자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에는 당시 조선군 전투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https://namu.wiki/w/%ED%8C%8C%EC%A7%84%EB%8C%80%EC%A0%81%EB%8F%84

 

 

임진왜란의 흔적이 있는 흥성고성

 

연암은 “1780년 7월 19일 독사부 영원위 고성 밖에 묵었다”라고 기록하여, 저는 독사부라는 지명을 찾느라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영원위 흥성고성(兴城古城)을 찾아가서 계요독사부(薊遼督师府)라는 현판을 보고 그 의문점을 해결하였습니다. ‘薊遼’ 글자가 초서로 쓰여있어 ‘요’ 자를 몰랐는데, 열하일기에 ‘조 씨는 요계(遼薊)에서’라는 기록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성내에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먼지가 펄펄 날렸고, 길바닥을 뒤집어 놓아 걷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이곳은 큰 규모의 평지성으로, 사람이 많이 살고 성황당과 문묘, 독사부, 상업 시설 등이 있어 마을 자체가 문화재 같았습니다. 산서성 답사 때 방문했던 평요고성과 비슷하지만, 시설은 미약한 편입니다.

 

《인조실록》에 “인조 17년, 흥성 바닷가로 조선 수군 6,000명을 12달의 군량을 준비하여 전함을 갖춰서 얼음이 풀리는 2월까지 안주(安州) 등의 해변에 모이게 하라는 청나라의 파병 요청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조선 군인이 싸우기를 거부하여 파병이 무산되었습니다.”

 

《열하일기》에 “영원성 안 한길 가에 조가(祖家)의 패루(牌樓)가 마주 섰는데, 조대락(祖大樂, 조대수의 형)의 패루요, 또 하나는 조대수의 패루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승훈(대수의 아버지)이 요동 부총병(副摠兵)으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구원하러 왔던 사람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의 흔적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암이 7월 22일, 전소고성(前所古城) 밖에서 묵었다고 기록한 곳이라 찾아보려 했으나, 일정이 늦어져 방문하지 못해 무척 아쉽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에 들어오니 밤 10시가 넘었는데, 내일 이제 고리에서 제사를 준비로 고유문을 쓰다가 새벽 한 시나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