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풍류(風流)와 한류(韓流)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 (돌)
사람 속에 천지 가락 있다네 (심)
내 겨레 본래 기운 있는 자리 (초)
여기서 바람이 불어 간다네 (빛)
... 24.11.29. 불한시사 합작시
풍류(風流)란 단순한 멋이나 취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부터 천지자연의 기운을 맘과 몸으로 받아 노닐며 조화롭게 드러내는 삶의 태도를 뜻했다. 아취(雅趣)와 멋스러움은 외형일 뿐 바탕에는 사람 속에 깃든 천지의 가락, 곧 자연ㆍ인간ㆍ공동체가 함께 호흡하는 운율이 스며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한류(Korea Wave)’라 불리는 K-컬처의 확산 역시 우연이나 일시적 유행으로만 볼 수는 없는 까닭이 있다. 한류의 근원을 더듬어 보면, 그곳에는 분명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가 혈맥처럼 흐르고 있다. 노래하고 춤추는 가무(歌舞)에 어우러진 신명은 한민족의 생활 감각이자 미적 감수성이며, 핏줄 속에 켜켜이 축적된 원초적 생명의 리듬이다.
불한시사의 합작시를 번역해 중국의 시인들과 문화예술계 그리고 철학계의 벗들에게 전했을 때, “중국의 풍류가 한국에서 꽃핀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 말속에는, 한때 대륙의 동북 고대국가들을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피웠으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잊히거나 사라진 풍류적 삶에 대한 반성과 부러움이 함께 담겨 있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풍류에 대한 선망과 격려이기도 하다.
사실 대륙의 동북에서 동이문명을 주도했던 고조선 문명의 고대국가들, 곧 부여ㆍ고구려ㆍ발해로 이어지는 문화권의 정신적 중심에는 신선사상의 신명(神明)과 이를 몸으로 풀어내는 가무의 풍류도가 있었다.
고운(孤雲) 최치원은 즈믄 해(천년) 전에 난랑(鸞郞) 화랑(김대문의 《화랑세기》에 기록된 인물)을 위해 지은 글 서문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는 현묘지도(玄妙之道, 이치나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오묘함)인 풍류도의 전통이 살아있다고 분명히 짚고 있다. 풍류는 단순한 오락이나 감정의 발산이 아니라, 유(儒)ㆍ불(佛)ㆍ선(仙)을 아우르는 하나의 고유 가락으로서 삶의 통합적 미학이었다.
오늘의 한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문화도 아니며, 다른 나라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장단이나 형식도 아니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쌓인 민족 고유의 리듬과 멋, 곧 풍류의 심층 구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 불한시벗들이 “풍류도(風流道)”라는 합작시를 쓰게 된 것도, 한류라는 현상의 표층을 넘어 근원적 정신을 되묻고 확인하려는 시적 실천인 셈이다.
중국 풍류 한국에서 꽃피나(돌)
한국은 동서문명 고이는 곳(심)
유불선 한 가락으로 뽑아내(초)
그건 바로 우리 고유의 풍류(빛)
이처럼 바람은 밖에서 안으로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겨레 속에 이미 깃들어 있던 기운이 세상 밖으로 불어 나가는 것이다. 필자가 90년대 후반부터 기운생동의 파동인 심물지파(心物之波, 다양한 자연물을 보고 마음에 담은 뒤 그것의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를 표상하는 물파(物波) 필묵예술운동을 펼쳤던 것도 풍류도 정신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풍류는 이렇게 민족 문화의 핏줄을 타고 이어지고 있으며, 그 현대적 변용인 한류는 오늘도 세계 속으로 끝없이 퍼져 나가고 있다. (라석)
|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