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념무상(無念無想) 말 잊고 생각 없이 바라보네 (달) 염에 이르러 염을 다한 마음 (돌) 이제 아쉬움 다 없어졌느니 (빛) 지금 여기 이미 갖춰진 자리 (초) ... 25.2.10. 불한시사 합작시 옥광 시벗이 산책길에서 보내온 구절에서 합작시의 초구(初句)로 삼았다. 그의 “말을 잊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바라보네. 이것!”은 단순한 정경 묘사가 아니다. 그는 언어 이전, 사유 이전의 자리에서 세계를 마주한 체험을 건네주었다. ‘말을 잊는다’라는 것은 분별의 언어를 거두는 일이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것은 개념의 그림자를 거두는 일이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대상도 관념도 아닌,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이것’의 현전이다. 그가 말한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이것'은 멀리 있는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각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하는 생생한 현존이다. ‘이것’은 주관적 심상도 객관적 사물도 아니다. 마음과 사물이 나뉘기 이전, 곧 심물합일(心物合一)의 장에서 드러나는 일물(一物)이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Es spricht(그것이 말한다)”의 ‘그것’ 또한 존재의 드러남을 가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눈 길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 (돌) 흰 눈 맞으며 무얼 찾고 있나 (달) 분별없는 바탕 자리 가는 길 (초) 흰 종이에 글 쓰듯 함 없는 함 (심) ... 25.2.6. 불한시사 합작시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은 잠시의 흔적이다. 한 번의 날갯짓, 한 번의 디딤이 남긴 자국은 찰나의 존재 증명처럼 보이지만, 해가 기울고 기온이 오르면 이내 스스로 자취를 지운다. 발자국은 ‘있음’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의 예고이며, 남김이 곧 소멸로 향하는 길임을 드러낸다. 서산대사의 ‘답설(踏雪)’ 선시가 일러주듯, 눈 위를 밟고 간 자는 발자국을 남기되 마음에는 남기지 않는다. 흔적은 생기나 집착은 두지 않는 것, 이것이 ‘설중보행(雪中步行)’의 수행적 태도다. 눈은 더러운 지표를 가리지 않고 덮는다. 얼어붙은 산하와 혼탁한 세상 위에 내리는 흰 눈은 미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준화’다. 덮음은 곧 드러냄의 다른 얼굴이다. 잠시 고요를 주지만, 그 고요는 해빙과 함께 본래의 결을 다시 드러낸다. 그러므로 눈은 정화의 상징이면서도 무상(無常)의 표식이다. 씻김은 지속되지 않으며, 맑음은 붙잡을 수 없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던 설경—발해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동파의 문사향(聞思香) 향기를 들을 수 있는 동파여 (돌) 오감을 튕겨 가락을 듣는 이 (초) 홀로 그 얼마나 쓸쓸했기에 (달) 코호강 생각에 귀가 가렵나 (빛) ... 25.2.4. 불한시사 합작시 소동파(蘇東坡)에게 향(香)은 단순한 취미나 풍류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과 유배의 세월 속에서 스스로 지켜내는 하나의 수행법이자, 일상의 자리에서 도(道)를 잇는 조용한 공부였다. 옛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향을 통한 수행, 곧 ‘향공(香供)’ 혹은 ‘향관(香觀)’의 전통을 이어왔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종교적 제의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는 수련이었고, 향을 바라보고 맡고 사유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수행 체계였다. 향을 크게 나누어 보면, 연기로 드러나는 '향연(香煙)'과 보이지 않는 '향기(香氣)'가 있다. 향연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지는 찰나생멸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멸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언(無言)의 설법과도 같다. 피어오르는 곡선과 흔들리는 흐름 속에는 미묘한 운율, 다시 말해 존재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향연을 바라보는 일은 곧 무형의 형상을 관조하는 일이며, 삶의 흐름을 잠시 멈춰 세워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