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동파의 문사향(聞思香) 향기를 들을 수 있는 동파여 (돌) 오감을 튕겨 가락을 듣는 이 (초) 홀로 그 얼마나 쓸쓸했기에 (달) 코호강 생각에 귀가 가렵나 (빛) ... 25.2.4. 불한시사 합작시 소동파(蘇東坡)에게 향(香)은 단순한 취미나 풍류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과 유배의 세월 속에서 스스로 지켜내는 하나의 수행법이자, 일상의 자리에서 도(道)를 잇는 조용한 공부였다. 옛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향을 통한 수행, 곧 ‘향공(香供)’ 혹은 ‘향관(香觀)’의 전통을 이어왔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종교적 제의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는 수련이었고, 향을 바라보고 맡고 사유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수행 체계였다. 향을 크게 나누어 보면, 연기로 드러나는 '향연(香煙)'과 보이지 않는 '향기(香氣)'가 있다. 향연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지는 찰나생멸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멸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언(無言)의 설법과도 같다. 피어오르는 곡선과 흔들리는 흐름 속에는 미묘한 운율, 다시 말해 존재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향연을 바라보는 일은 곧 무형의 형상을 관조하는 일이며, 삶의 흐름을 잠시 멈춰 세워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량만(馬梁灣)에서 사람만 배타나 말도 배타네 (빛) 제주에서 타고 마량에 내려 (돌) 말들처럼 늘어선 저 까막섬 (달) 만주까지 달려가야 할 자리 (초)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장흥의 사자산 기슭에 자리 잡은 강대철의 토굴조각을 구경 간 지가 벌써 한참 지났다. 불한시사 시벗들이 몰려가 그가 10년에 걸쳐 파고 깎고 꾸며놓은 신비스런 조각토굴을 둘러보고, 다 함께 바닷바람을 쐬자고 가보았던 곳이 마량이다. 장흥에서 비롯한 탐진강을 따라 ‘수문리’를 거쳐 오면서, 숨어 사는 조각가 강대철을 빗대어 “숨은 이가 여기 있다고 수문리인가” 보다는 재담으로 터졌던 함박 웃음소리가 귀에 어린다. 마량은 여러 곳에 지명으로 남아있지만, 이곳은 제주도에서 키운 말들이 배에서 내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량이란 말 마(馬) 자와 나무다리 량(梁) 자가 합쳐져서 ‘말이 건너는 나무다리’란 뜻이다. 포구의 표지판을 보니,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머물던 전략요충지였다고 한다. 태종 임금 때에 마두진이 세워졌고, 정유재란 뒤에는 거북선 한 척이 묵었다고 한다. 전장을 누빌 말들이 씩씩하게 나무다리 마량을 건너오던 모습은 둘레의 까막섬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목민심서의 산실인 사의재 (돌) 주막집 사랑방에서 바뤘나 (빛)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으로 (달) 유배의 길에도 의를 세웠네 (심)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신유박해의 여파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 약 4년 동안을 강진 읍내의 한 주막집 사랑방에 머물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되어 낯선 남도의 객지 주막방에 기거하게 된 그의 처지는, 조선 후기 지식인이 겪은 정치적 박해와 시대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바람을 막는 허름한 방, 떠도는 장정과 나그네가 오가는 주막집 한쪽 편에서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학문과 성찰에 더욱 몰두하였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수많은 저술의 씨앗 또한 이 시기의 고독한 사색과 절제된 삶 속에서 잉태되었다. 이 주막집 사랑방 문 위에 걸린 현판이 바로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하도록 경계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유배 생활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세운 삶의 규범이자 학문적ㆍ윤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