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8년 전인 2007년 10월 4일, 부산이 자랑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12회째 행사가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의 특설무대에서 개막되었다.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도 개막식 무대에 펼쳐지는 나라 안팎 톱스타들의 화려한 입장 행렬, 각국에서 온 영화인들을 보기 위해 5천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였고, 이어 개막작인 중국 영화 1편이 드넓은 모래사장을 상생한 영상과 귀를 찢을 음향으로 가득 채웠다. 보름 전 KBS 부산방송총국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공식 초대를 받아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제목은 '집결호'였다. 중국 영화여서 한자로 ‘集結號’라고 병기되어 나왔는데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무슨 배 이름인지 뭔지 궁금해하면서 두 시간 넘는 영화를 다 보았다. 그러고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집결호란 배 이름이 아니라 집결하라는 신호라는 것이고 이 영화에서는 군에서 작전상 후퇴를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그러니 우리말 번역으로는 집결호가 아니라 ‘집결나팔’ 혹은 ‘집결신호’라고 했어야 옳았다.
아무튼 우리나라 제작진들이 제작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중국 영화, 더구나 우리의 625 남북전쟁에 중국군으로 참전해 미군을 죽이고 승리하는 이야기까지 포함된 영화를 개막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당시 김동호 조직위원장은 이 영화가 "아시아 영화인들의 연대를 꿈꾸어 온 부산영화제의 목표와 닿아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고 실제 당시 부산영화제의 주제도 '경계를 넘어서(Beyond frame)'여서 새로운 시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 했다.


중국의 펑 샤오강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이른바 국공내전, 곧 1948년 중국 인민해방군과 국민당 군대의 치열했던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해방군 9연대의 구지디 중대장과 46명의 병사는 퇴각하라는 명령에 해당하는 본부의 ‘집결호’가 울릴 때까지 적을 막아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적의 공세는 만만치 않고, 중대장 구지디(장한위)와 46명의 대원은 퇴각을 명하는 ‘집결호’를 기다리며, 목숨을 걸고 진지를 지키지만 결국 구지디를 뺀 모든 대원은 전멸하고 만다.
구지디는 한국전에도 참여해 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전쟁영웅이 되었지만, 당시 혹시 ‘집결호’ 나팔소리를 듣지 못해 부하들을 살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주검을 못 찾아 실종 처리된 46명 부하의 주검을 찾기 위해 외로운 전쟁을 벌여 마침내는 그들의 명예를 찾아준다는 내용이다.
중국 영화 <집결호>에는 우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진들이 참여했다. 중국의 펑샤오강 감독이 그 전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강제규 감독을 만났는데, 전쟁영화를 제작하고 싶은데 할리우드 제작진을 고용하기엔 제작비가 부족하다고 했더니 한국 제작진들을 소개해 주어서 특수효과, 특수분장, 미술, 음향효과 네 부분에 걸쳐 한국 제작진 25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전 해 겨울 중국에서 가장 추운 지방인 동북구 지방에서 4달 동안 100% 야외촬영을 해냈고 또 화재 장면에서 상황이 어려워져 촬영이 중단된 적 있는데 한국 특수효과 제작진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치는 경이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펑 감독은 영화제에서 밝혔다.

흔히 중국 영화가 그렇듯이 중국 군인들의 멋진 승리만을 다루었다면 부산영화제에 초대받기가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적인 전투 장면에다가 부하 중대원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전우애, 말하자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문법에 방점이 찍혔기에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한 뒤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여세를 모아 이듬해인 2008년 3월에 국내 극장에서 정식으로 상영되었다. 물론 일반 극장에 걸릴 때는 중국에서 개봉했을 때 받은 중국인들의 높은 인기가 선전문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서울에서 상영을 시작한 2008년 그해 9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11차 평양국제영화축전에 출품돼 최우수상을 받는다. 9월 26일 평양국제영화회관 폐막식에서 이 영화는 최우수영화상을 비롯해 연출상과 기술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2008년 남과 북에서 비슷한 시기에 상영돼 양쪽에서 다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가 된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우리 영화도 중국에서 상영되고 중국 영화도 우리 극장가에 걸렸지만 이렇게 남북한을 거의 같은 시기에 찾아가 양쪽 모두에서 호평을 받은 사례는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18년 전의 이 영화 이야기를 왜 다시 하는가? 이 영화가 지난달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다시 상영된 것을 보고 감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3년을 끌던 남과 북 사이의 전쟁은 긴 협상 끝에 지난달 말에 휴전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우리가 휴전선을 지금처럼 긋고 대치한 지 72주년에 즈음해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서 우리의 현실이 다시 참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사람들이 오고 가고 예술과 문화행사를 주고받던 남북은 최근 20년 가까이 교류가 끊어지면서 완전히 가장 첨예한 대치를 벌이고 있다. 북한이 우리의 주적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다시 등장하고 있고 휴전선을 두고 양쪽의 살상무기 겅쟁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공공연하게 선전하며 언제든 상대를 끝장낼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남북한을 동시에 찾아 사람들을 어루만져준 이 중국영화의 값어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영화가 남과 북에서 동시에 호평을 받은 것은 전쟁이 아니라 인간애, 대결이 아니라 전쟁의 참화, 인간성의 상실, 그러면서도 전우애와 인간의 존재이유를 그렸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전쟁을 생각하는 위기의식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전쟁의 공포, 그에 따른 대결 의식이 아니라 평화의 열망, 한 민족으로서 함께 한 우리들의 동포애,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한 대화와 화해의 모색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이 중국영화가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광복절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80년이지만 남북이 갈라서고 대치한 지 80년이기도 하다. 우리가 처한 현실, 남북한 사이의 높은 긴장과 대치라는 상황은 남북한 당사자의 손을 넘어, 국제 정세가 서로 큰 진영으로 갈리고 합치는 대결 정세로 긴박하게 이동하는 데 따른 측면이 강하긴 하지만, 이런 엄중한 형세를 푸는 방법은 '총에는 총으로'라고 하는 어법을 넘어서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남북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적대감과 공포감, 위기감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하는 점이 핵심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남과 북 모두는 이런 공포감을 계속 키워왔다. 휴전선에 처져 있는 높은 철책들, 서로를 비방하던 확성기들, 서로에게 뿌리는 비난 유인물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해왔을 것이다. 결국에는 인간의 기본 마음을 찾아서 그것을 연결고리로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원론적인 해법을 분단 80년을 맞아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