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 1년(서기 2025년) 4월 4일 내란 우두머리가 헌재에서 파면되는 순간, 기쁨의 환호성이 천지를 뒤엎는 듯하였다. 산천초목도 춤을 추고 귀신도 눈물 흘렸다.
하늘을 떠돌고 있을 박규수(1807-1877)와 그 문하생들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법하다. 살아생전에 그들은 현재의 헌재 뜰에 자리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갈망하지 않았던가.
박규수를 만나보자.
대동강에 양각도라는 섬이 있었고 그 섬의 서쪽 맞은편 강가에 돌로 쌓은 성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방수성(防水城). 그 성 앞으로 제너럴셔먼호라는 무장한 상선이 이동하여 정박한 것은 1866년 7월 20일이었다. 그들은 마구 총을 쏘아대고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한다. 단아한 평안 감사 박규수의 수염이 바르르 떨린다. 소매를 떨치고 대동강 변으로 나가 작전을 지휘한다. 셔먼호는 주둥이가 큰 대완구 대포와 조총을 쏘아댄다. 조선측에서는 재래식 화승총과 활로 응사한다. 가망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적을 섬멸한다. 밤늦게 조정에 보낸 승전보다.
“상대의 배는 우뚝하기가 견고한 성과 같은 강적인데, 우리 진영은 군비와 방위 태세가 실로 한심한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배를 불태워 파괴하고 모조리 섬멸하였습니다. 비로소 소요가 진정되어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멈췄습니다.”
박규수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감격한 고종 임금은 박규수를 이렇게 치하한다.
“글 읽는 선비인 경(卿)은 설욕책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그것은 손바닥에 팔인(八人)이라고 쓴 지모지략과 같았다(卿以讀書之士, 深究禦侮之策, 掌寫八人, 智謀略同)”
그런데 ‘손바닥에 팔인(八人)이라고 쓴(掌寫八人) 지모지략’이란 무슨 말일까? ‘八人’을 조합하면 불 ‘火’가 된다. 옛날 중국의 제갈량과 주유(周瑜)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칠 비책으로 각자 손바닥에 ‘八人’, 곧 ‘火’자를 신호로 ‘화공책’을 구사했다는 《삼국지》의 고사를 가리킨다. 박규수는 이렇게 제갈량의 명성을 얻었다.
박규수는 칭송과 포상에 손사래를 친다. 그는 “당초에 셔먼호의 진입을 막지 못했을뿐더러 성 아래까지 육박했는데도 쫒아내지 못했고, 우리 군관이 억류되는 모욕을 당했는데도 즉시 설욕하지 못했다”라고 그에 관한 벌을 내려 달라고 청한다. 나아가 모든 공을 민간인과 부하들에게 돌린다.
“그때 온 성의 군(軍)과 민(民)이 울분을 품은 나머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모두 모여들고, 북을 치지 않았는데도 다투어 전진하여 총탄과 화살을 난사하고 소리쳐 기세를 서로 도왔으며 사생결단 목숨을 걸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오랑캐를 도륙하고야 말 태세였습니다. 이번 승리는 모두 이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의연금을 갹출한 데 기인한 것입니다. 애초부터 신의 지휘 때문이 아니었으니,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박규수는 중앙으로 호출된다. 한성판윤겸 형조판서ㆍ대제학ㆍ우의정으로 영전을 거듭한다. 연암 박지원의 친손자이기도 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명민한 양반 자제들이 드나들면서 박규수의 훈도를 받은 것은 그 시기였다. 문하생들은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비로소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고 구국의 결의를 다진다.
박영효의 회고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伯兄: 박영교)이 재동 박규수의 집 사랑에 모였지요… 귀족을 공격하는 《연암집(燕巖集)>의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또한 역사학자 신채호는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김옥균이 우의정 박규수를 방문했을 때, 박규수는 그의 벽장에서 지구의 하나를 꺼내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 가운데 나라(중국)가 어디에 있는가?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가운데 나라(중국)가 된다. 자, 오늘날 어디에 따로 중국이 있는가.’
김옥균은 당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사상, 곧 대지의 중앙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며,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은 사의(四夷, 네 방면의 오랑캐)이며, 사의(四夷)는 중국을 숭상한다고 하는 사상에 얽매여서, 나라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박규수의 말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무릎을 쳤다. 후일 그는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깃발 아래 개화파들이 1884년 12월 혁명을 감행했으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김옥균이 임금에게 호소했던 말 속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선을 위하여 생각건대, 청나라는 본래 믿을 만하지 못하고 일본도 또한 그러합니다. 자주적인 개혁과 근대적인 산업 그리고 군사력 없이 자주독립을 유지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겠습니까? 양반입니다. 양반을 척결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옛날 국운이 융성했던 즈음엔 모든 기계물산(器械物産)이 중국ㆍ일본에 못지않았으나 오늘날은 모두 폐절되어 그 흔적도 없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양반의 발호와 전횡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상업을 위주로 하여 이익을 다투는 때이니, 양반을 없애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를 깊히 깨달아 속히 아주 무능하고 고루한 수구파 대신들을 배제하고 문벌을 폐하며….”
그들이 갈망했던 신분 차별 없는 반봉건, 외세의 족쇄를 벗어난 자주독립은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21세기 우리 사회는 그것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140년 전의 그 깃발을 향해 지금도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중일까?
그때의 날갯짓이 격랑의 세월을 건너 민기 1년에 빛의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닐까?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서북쪽 뜰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왓장 하나, 주춧돌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제갈공명’의 집터에는 백송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 남산에는 중국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일본인은 일본인의 처지에서 일본사를 쓰고 미국인과 중국인은 또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인도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일본인의 영혼으로, 혹은 미국인의 눈으로 제 나라 역사를 쓰고 있다면 그 넋은 과연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겨레의 선각자들과 민중은 매번 실패하고 좌절로 끝나고 말았을까? 매번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까? 아닐 수도 있다. 실패한 게 아니라 후대와 또 그 후대를 통해 고난 어린 승전보를 써가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우외환의 거친 격랑을 스스로 헤쳐 나간 발전의 역사가 우리의 발자취가 아닌가. 오늘날 광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빛의 군무 속에는 파란 노도의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가면서 사고하고 행동한 선각자들과 민중의 갈망이 숨죽인 채 물결치고 있지 않는가.
그 파동에 힘입어 우리는 내란으로 상징되는 일천 년 응결된 온갖 적폐를 청산하고 K-민주주의의 일대 도약을 이룰 수 있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이 열리고 있을지도. 하지만 “물을 마실 때는 그 원천을 생각하라.” 음수사원(飮水思源)!
민기 1년 5월 29일 사전투표 하는 날 새벽,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