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바깥 여행을 할수 없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시대에 14살 소녀의 몸으로 모험 여행은 떠난 김금원은 누구였을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으며 그 기분은 어떠했을까? 첫걸음의 행색과 여정은? 그녀의 육성을 직접 들어 보자 .“마음에 계획을 정하고 부모님께 여러 번 간절히 청하니 한참 뒤에야 겨우 허락하셨다. 그러자 가슴이 트이며 마치 새가 새장을 나와 저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천리마가 재갈을 벗어 던지고 천리를 내닫는 듯한 기분이다. 그날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꾸려 먼저 네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경인년(1830년) 봄 삼월 내 나이 바야흐로 열네 살을 넘겼을 무렵이었다.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땋은 뒤 가마에 앉아 푸른 실 휘장을 두르되 앞은 보이게 하고 제천의 의림지를 찾았다. 예쁜 꽃들이 웃음을 터뜨릴 듯하고, 아지랑이같이 피어난 향기로운 풀에서는 초록빛 이파리가 막 펼쳐지고 있다. 푸른 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마치 수가 놓인 비단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가슴 속이 시원해지니 폐부를 씻어내고 때와 먼지를 닦아내는 듯 하다. 의림지(義林池: 충북 제천의 못) 에 도착했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같은 시기 여성 김삿갓이 있었고 그녀가 여행기를 남겼다는 사실은 왜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14살 때 길을 나선 남장 소녀의 이름은 김금원(金錦園, 1817~?). 조선 후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꼭 열 살 터울이다. 김삿갓은 스무 살 때 집을 나왔다고 하니 1827년 무렵이다. 금원이 집을 나선 것은 1831년이라 하니, 김삿갓 보다 4년 늦게 집을 나선 셈이다. 이 두 남녀의 여정이 교차했을 수도 있을지, 혹 어딘가에서 같은 주막에 묵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주막의 마루 위에서나 어떤 마을의 정자에서 서로 시를 겨루었다면 어떤 작품들이 나왔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금원의 여로를 한 번 짚어 본다. 그녀의 여행은 14살 소녀 때부터 시작하여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시간 간격을 무시하고 여정을 모두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천-단양-영춘-청풍-(아래 내금강) 단발령-장안사-표훈사-만폭동-수미탑-중향성-불지암-묘길상-지장암-사자암-(아래 외금강) 유점사-구룡소-은선대-십이폭포-(아래 관동팔경) 통천 총석정-해금강-고성 삼일포-간성 청간정=강릉 경포대-울진 망양정-평해 월송정-삼척 죽서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한 명의 궁녀와 김옥균이 비밀리에 밀통하기 시작한 것은 1874년 김옥균의 나이 23살 때였다. 궁녀의 나이는 훨씬 많았으니 31살. 그 때부터 궁녀는 김옥균에게 구중심처 궁중의 동정을 전해 준다. 김옥균은 자신의 일기(1884년 12월 1일 자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궁녀 모씨는 나이는 42살이고, 신체가 건대하며 남자 이상의 힘을 가져 보통 남자 5, 6인을 당할 수 있다. 평상시에 고대수(顧大嫂)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곤전(중전)의 근시(近侍, 웃어른을 가까이 모심)로 뽑혀 있는 분인데, 벌써 10년 전부터 우리 당에 밀사(密事)를 통고해 주는 사람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대수로 통하는 이 궁녀가 기골이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민비의 측근에서 시중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김옥균을 위해 간첩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기에서 김옥균이 ‘우리 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개화당’ 또는 ‘독립당’을 말한다. ‘당(黨)’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정당과는 거리가 멀고 일종의 비밀 동아리 같은 것이었을 터다. 오늘날의 언어 감각으로는 ‘파(派)’라 하는 것이 보다 맞을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