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2월 초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김옥균은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조선은 자객을 밀파하여 김옥균을 제거하려 한다. 이때 장은규와 송병준이라는 자가 자청하고 나선다. 이 자들은 누구일까? 장은규는 의화군을 낳은 장 상궁의 오라비. 장 상궁이 민비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쫒겨나면서 곤경에 빠진 집안을 일으킬 목적으로 김옥균 암살을 자원한 것이다. 한편,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민씨 집안의 식객 노릇을 하던 중 개화파와 인연을 맺었다. 1882년 9월 김옥균과 박영효가 방일할 때 안내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김옥균과 아는 사이다. 1885년 9월 강은규와 송병준은 고종의 위임장과 자금을 받아 일본에 잠입한다. 김옥균에게 접근한 송병준이 넌지시 귀국을 종용한다. 국내에 들어가 동지들과 함께 병사를 모집하여 도성을 공격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김옥균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는 다른 길을 찾는다. 갑신정변 때 주동자들에 의해 영의정에 추대된 바 있는 이재원이 강화도 수령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김옥균은 편지를 쓴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내용이다. 곧 일본내 급진세력과 손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혁명가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은 집요하고 절박했다. 그만큼 김옥균이 그가 처한 위험은 가팔랐다. 이번 글에서는 그 대목의 첫머리를 들추어 보려 한다. 1884년 12월 초 혁명에 실패한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인천)로 황망히 몸을 피한다. 항구엔 치도세마루라는 일본 여객선이 정박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본배. 천신만고 끝에 배에 도착했지만, 동행한 일본인들이 김옥균 일행의 승선을 가로막는다. 당장에라도 조선의 체포조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피가 마르는 상황이다. 그 순간 구원의 손길을 뻗힌 이는 일본배의 선장 쓰지 쇼사부로. 김옥균 일행을 밤중에 몰래 승선시켜 선창에 숨겨 준 것이다. 다음날 12월 9일 영의정 심순택의 지시로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외교부 차관격이었지만, 실제로는 전반적인 외교업무를 관장)가 이끄는 조선군이 제물포항에 들이닥친다. 묄렌도르프는 일본 공사 다께조에게 반역자들을 당장 넘겨달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다께조에는 김옥균과 한양에서 같이 도망하여 승선해 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구명선을 같이 탄 처지다. 김옥균 일행은 설마 다케조에가 자신들을 조선군에게 넘겨주리라고는 상상하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왕조는 개국 484년 만인 1876년 나라의 빗장을 열었다. 그 뒤 1880년대에 들어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격랑의 시대에 집권 보수 사대파는 뭐든지 청나라의 그늘 속에 안주하려 하였다. 집권층은 큰 나라로부터 자주독립하려는 생각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적대시했다. 그들의 적이 바로 개화파였다.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개혁을 서둘렀다. 낡은 봉건왕조를 뜯어고쳐 재단장하려는 그들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훗날 일제에 강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친일논쟁을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보수 사대파의 철옹성 같은 장벽과 야수와 같은 외세의 도전 속에 놓인 조선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절감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혁명가들이었다. 민중을 계몽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조선을 구하려 했다. 그들은 소수였고 권력도 없었다. 그들을 적대시하는 보수 사대파는 청나라를 뒷배로 삼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개화파 혁명가들이 품었던 갈망은 조선의 자주독립, 그것이었다. 서재필의 말이다. “그때 김옥균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