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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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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백성이 나라 주인임을 자각하는 첫 체험

그러나, 1898년 3월 함성 위로 폭설이 내린 뜻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3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아마 오늘도 대한민국의 거리는 함성으로 뒤덮일 것 같다. 이는 1898년 3월께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해 3월 10일 서울 종로에는 약 1만 명의 남녀노소들이 모였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그 당시 1만 명은 오늘날의 몇 명에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파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침의 뜻이 같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그 함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직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판사ㆍ검사라는 이름의 법비(法匪)들인 것 같다. 그들은 죄 없는 생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기도 하고 내란 수괴를 탈옥시키기도 하고 수염에 난 불을 끄듯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이 자들의 폐악이 극에 달해도 그들을 징치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국민이 주인일 뻔한 일들이 일어나긴 한다. 그 원초적 체험을 우리는 언제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였다. 아관파천이

1898만민공동회, 온 백성이 돈과 물자를 대다

명주 뺏은 도적, 만민공동회 얘기 듣고 돌려줘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2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내란 우두머리와 그 처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니 비웃듯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고 있고 그 졸개들이 곳곳에서 독을 내 뿜고 있다. 이 역적들이 줄줄이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는 그날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석 달 가뭄 속의 잉어가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날을 고대하면서 1898만민공동회의 시공간으로 떠나 본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만민공동회와 그 배후 단체인 독립협회에 돈과 물자를 보탰다. 어느 한때의 서울을 살펴보면, 서울 다동에 사는 박씨 부인은 집 판 돈 1백 원을, 다리 밑 거지는 1원을, 나무장수는 장작 수십 바리를 풍찬노숙 땔감으로, 과일장사는 배 3상자를, 군밤 장수는 군밤 판 돈을(얼마인지 기록이 없음), 빈촌 필운대 사람들은 6원을 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지방에서도 뜨거웠다. 삼화항(三和港, 지금의 진남포)에서는 관과 민이 공동 모금하여 133원을, 인천 시민들은 36원 27전을 보냈다. 과천 사는 어떤 농민이 나무를 한 바리 팔러 서울에 왔다가(아마 오늘날 내란 수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고개마루를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무판 돈 30냥 가운데서

1898년 '풍찬노숙'은 지금

왜 장작불을 지피며 거리에서 밤을 새는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1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98년 11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근 50일 동안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했다. 더러는 밤샘 시위를 했는데 이를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 불렀다. 찬 바람 맞으며 언 밥 먹고 한 데서 자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뜨겁게 외친다. 임시장터를 열고 장국밥을 제공한다. 자치경찰격인 ‘규찰대’를 조직하여 불순분자들을 단속하고 질서를 유지한다. 땔나무꾼은 지게로 나무를 실어온다. 그 나무는 밤샘 시위자들의 장작불이 될 것이다. 콩나물 파는 할머니뿐 아니라 순검(巡檢)들도 푼돈을 털어 시위 군중을 응원한다. 부인들은 부인회를 학생들은 학생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아이들의 활약이 눈부시고 눈물겹다. 남대문 밖 이문골애 사는 김광태를 비롯한 아이들은 ‘자동의사회(子童義士會)를 만들어 거리에서 외치고 연단에 올라가 꼬막 같은 주먹을 흔들며 연설하기도 한다. 열 살도 못 된 아이들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가? 왜 장작불을 지피며 거리에서 밤을 새는가? 묻지 말자. 오늘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가. 단지 장작불이 촛불로 촛불이 빛의 응원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또 하나 다른 것이 있는 듯하다. 그때는 총칼로 해산당했고

《동학사》, 오늘날의 용산궁을 미리보다

궁궐 안에는 무당ㆍ판수ㆍ승려를 불러 굿을 하고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9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50여 년 전의 책이 지금까지 집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이 무더기로 버려진다. 반백 년이 지난 책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기껏 두엇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지영의《동학사》. 1973년 출판본이 주인을 몇 번 바꾸어 내게 온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이 책은 원래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왜(倭)’를 일부러 ‘복(伏)’이라 적고 있는데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것이라고 했다.(이 책의 411쪽) 이 책을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읽다가 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애써 비유를 해 본다면, 나를 칭칭 얽매고 있던 촘촘한 올가미가 한순간 썩은 동아줄처럼 허물어 내리고 정신과 몸이 공중 부양하는 듯하였다. 오랫동안 유폐되었던 깜깜한 동굴에서 뛰쳐나온 듯도 하였다. 와룡생의 무협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던가?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을지. 무협지는 버렸지만 《동학사》는 아직 못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이 책을 들춰보는데 첫눈을 맞추었던 스물두 살 때의 감동이 전혀 오지 않는 것이다.

나라(奈良)에 있는 관음상은 조선에서 조각한 것

보수주의자의 아름다운 초상 (2)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8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저번에 펄 벅 여사의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에 나오는 주인공 일한의 아버지를 얼핏 엿 보았다. 펄 벅은 제 나라 전통을 사랑하고 긍지를 깊히 품고 사는, 완고해 보이는 조선 선비를 잘 그려내고 있다. 조금 더 그 선비를 구경해 보기로 하자. 일한의 집안은 안동김씨 명문가다. 중전마마는 일한을 가끔 불러 대화를 나눈다. 일한과 중전은 이성으로서 끌림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한은 중전이 부르지 않아도 중전을 찾아간다. 일한의 아내는 질투에 시달리기도 한다. 어느 맑은 날 일한이 중전을 만나고 나오자, 대궐 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일한은 대궐에서 가까운 성안에서 살고, 부친은 대대로 살아온 성 밖의 시골집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가정사에 무심하지만 그렇다고 여색이나 도박에 빠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친구 없이는 못 산다. 아버지 집에 친구들이 모이면 으레 같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항상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흐뭇해한다. 그들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하거나 조국의 영웅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하거나, 일본의 불교가 조선을 통해서 건너가 개화했다는 것을 논하거나, 일본의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예술품과 문

보수주의자의 아름다운 초상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눈에 광채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7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938년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은 1963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소설로 펴냈다.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 사실과 상상이 잘 버무려져 있다. 주인공 김일한은 진보 개혁 사상을 품고 있다. 그는 1883년 가을 조선 첫 방미사절단(‘보빙사’)의 고문격으로 동행한 바 있어 나라 밖 세상을 본 바 있다.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보수주의자들이다. 펄 벅은 일한의 부친을 눈앞에 보이듯이 잘 그려낸다.일한이 둘째 아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하러 갔을 때의 장면이다.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야!” 노인은 소리쳤다.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웃음으로 치켜 올라가고, 얼마 안 되는 회색 수염이 그의 턱 위에서 떨린다. “네, 아이는 어제 아침나절에 났는데, 잘생겼고 튼튼하며 큰 놈보다 약간 작은 정도입니다. 외양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이의 귀를 생각하고 잠시 멈춘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재촉한다. “그 애의 왼쪽 귀가 좀 온전치 못합니다. 사소한 흠입니다만…” “김씨 가문에 흠이란 없느니라. 틀림없이 네 처가인 박씨의 혈통에서 온 것이겠

이완용과 이용구의 부활?

지금 한국은 이완용 때의 한국이 아니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5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우리나라는 검버섯과 곰팡이가 핀 늙은 나라일까? 아니면 초롱초롱한 눈망울, 뜨거운 갈망을 지닌 젊은 나라일까? 길거리에 나가 보면 서로 대적하는 두 물결이 부딪친다. 혼탁한 격류가 소용돌이친다. 같고도 다르고 다르고도 같은 100여 년 전의 시공간을 불러내 보자. “대한제국 소년들이여 너희는 배우고 또 배워 문명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려면 너희의 심장에는 용맹한 기상이 용솟음쳐야 하고, 너희의 머릿속에는 모험 정신이 가득해야 한다. 문명이라는 거센 파도를 헤치고 진군하라, 대한의 소년들이여!” - 이도영, 《대한민보》, 1910.2.27 “우리 한국은 4천여 년 늙은 나라로 정치도 늙고 인민도 늙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그 주인이 늙고 기력이 없음을 업신여겨 서까래도 빼어가고, 결국에는 그 이웃집 건장한 소년이 그 집 주인의 수족을 묶는 한편 작은 방에 거처케 하니 어찌 가엽지 않으리오. 젊은 사람은 항상 장래를 생각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에 힘쓰며,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에 힘쓰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동포들은 진보에 힘써서 우리나라를 소년국으로 만들지니라." -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