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화성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염거화상은 신라 구산선문의 최고 가람인 가지산파를 개창한 도의국사의 직계제자로 가지산파 2대조사로 신라 문성왕6년(844)에 입적하였다. 현재 용주사는 창건당시에는 갈양사(葛陽寺)였다. 염거화상은 당대 덕망이 높은 선승으로 갈양사를 선(禪) 수도도량으로 하여 많은 수행승들을 배출하였다. 갈양사는 이후 고려시대에는 혜거국사가 중창불사를 단행하였으며, 고려 태조의 요청에 따라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어 국가적 축원도량으로 발전하였다.
혜거국사 당시에는 고려왕실의 요청에 따라 수륙대재(육지와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극락천도를 위한 천도재)를 거행하여 지금 용주사의 대표적 법회로 자리잡았다. 수륙대재는 지구상 지배자인 사람은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있는 모든 존재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넋을 위로하고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에게 불법을 널리 펴는 천도의식이다.
그 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용주사는 임진, 병자 전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축물이 불타서 폐사되었으나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 화산으로 옮기면서 융릉을 보살필수 있도록 절을 다시 일으켜 왕실 원찰로 삼아 불법(佛法)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세손일 때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채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 생전에 다 하지 못한 효도를 대신하여 아버지 사도세자를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폐사터가 된 이곳에 용주사를 지었다. 그리고 애초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릉원(현재의 융릉)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융릉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왕실의 지원으로 성장한 용주사는 조선 후기 불교를 대표하는 절로 성장하여 전국 5규정소(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절) 가운데 하나로 승가의 기율을 바로잡고 통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경기도 남쪽에 있는 많은 절들을 이끄는 제2교구 본사며, 많은 불자들과 외국인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찾아 한국불교를 수행과 가르침을 알고자 즐겨찾는 사찰로 수도권의 대표적 절로 성장하였다.
정조대왕이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의 발현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뜻으로 창건된 용주사는 유교와 불교의 이념이 서로 만나 화합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보기드문 유불(儒佛)의 이념이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교는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장 중요시 하였는데, 유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는 것을 가장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인데, 불교에도 부모은중경을 통하여 얼마나 효도를 중요시 하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