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7 (금)

  • 흐림동두천 6.0℃
  • 맑음강릉 8.3℃
  • 박무서울 9.2℃
  • 박무대전 8.0℃
  • 박무대구 8.4℃
  • 박무울산 11.0℃
  • 박무광주 10.7℃
  • 맑음부산 14.5℃
  • 맑음고창 8.3℃
  • 구름많음제주 17.0℃
  • 구름많음강화 6.9℃
  • 구름많음보은 4.5℃
  • 구름많음금산 5.2℃
  • 맑음강진군 8.2℃
  • 맑음경주시 7.1℃
  • 맑음거제 10.9℃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전체기사 보기


삼국통일 혼란기에 백제지역에 세워진 무등산 원효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서기 600년대 혼란기에 태어나,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공부하고 포교하며 살았던 당대 스님들들은 왕실안녕과 귀족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불교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역사적 장면을 보았던 한국불교의 대스승 원효대사가 있었기에 이후 전국의 곳곳에는 원효스님의 이름을 딴 많은 절들이 생겨났다. 원효스님은 서기 617년 태어나 686년 입적한 신라 토종 화엄사상을 개척한 스님으로 당시에는 화엄학의 선진국인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화엄사상의 초조(지엄)로부터 화엄종을 도입한 의상대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런데 원효는 젊어서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고 신라땅을 떠나려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는 배가 있는 당진포구 근처의 한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한 밤중에 깨어나 목을 축이고자 마신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물이었음에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고뇌하게 되었다. 원효는 해골물을 마신 뒤 모든 사물과 불교에서 구하고자 하는 진리에 대하여 고심한 결과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일체유심조)임을 깨닫고. 당

천진스러운 나주 불회사 벅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나주시 다도면 불회사 입구에는 투박하고 길쭉한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람 모습으로 새겨진 벅수가 서있다. 불회사는 백제시대 동진으로부터 온 마라난타(서기 384년 백제입국) 스님이 세운 절이라고 전하는 유서깊은 절인데, 산길을 돌아서 오르는 절 입구에 귀한 벅수가 세워져 있었다. 이 벅수는 경사져 오르는 길 양 옆에 서로 마주보며 서있는데,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제멋대로 흙으로 빗은 듯 투박하면서도 정다운 모습으로, 조선시대 천진불을 조각하듯 욕심없는 불모조각가가 한국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불회사의 벅수는 높이 1.5m정도로 장승처럼 높고 크지도 험상굿지도 않고 정답고 아담하다. 벅수를 2기로 양 옆에 새긴 것은 벅수도 남녀로 쌍을 이루게 한 것이며, 남자는 긴 수염과 상투를 튼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여자는 부드러운 느낌의 미소가 보이도록 표현하였다. 남자 벅수의 몸에는 '하원당장군' 여자 벅수의 몸에는 주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절 입구의 벅수는 불교의 수호신인 사천왕이나 금강역사와는 또 다른 의미의 한국인의 토속신으로 또 다른 의미의 신성구역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본다. 요

한국인의 자연관을 담은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조선시대 중기 이땅에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던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전체를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하여 자신이 태어나 살던 한적한 시골 고향땅에 조그마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며 살아왔던 조선시대 한 성리학자 삶의 이상향 이었다. 소쇄원을 세웠던 양산보는 조선 중기 신진 사대부로 이름을 날렸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신흥사림파를 대표하여 기존 세력인 훈구파와 다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함으로 정읍으로 유배되고 결국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사약을 받고 죽게됨에 따라,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중상모략이 판치는 세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무등산 골짜기에 숨어살면서 맑은 계곡이 있는 이곳에 유유자적 자연인으로 살며 멋스럽게 살아온 자취를 후세에 그대로 남겨준 것이다. 소쇄원의 뜻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란 뜻으로, 중국의 송나라시절 주자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꾸며 무이산 계곡에 무이구곡을중심으로 무이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주자와 같은 은둔한 삶을 살면서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하며 살고자 하였다. 소쇄원은 계곡을 중심으

절에 온 이를 세심하게 챙겨주는 나주 '불회사'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세운 천년고찰 나주 불회사를 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 월륜천소수무흔 댓잎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요,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 흔적은 남지를 않네. 智慧存於明者心 如淸水在於深井 지혜존어명자심 여청수재어심정 지혜는 밝은 사람 마음에 있는데, 마치 맑은 물이 깊은 샘에 있는 것과 같다네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일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 나주 불회사 주련 해석- 한가위 성묫길이 막힐 듯하여 지난주에 한발 빠른 성묘를 마치고 지방에 내려간 김에 나주 불회사(佛會寺)에 들렸다. 특별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고건축을 전공한 남편 덕에 고건축물인 절 답사길에 따라나선 지도 어느덧 30여 년이 훌쩍 넘는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이제 고찰(古刹)이면 고찰, 서원(書院)이면 서원 등 나름의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자부심(?)을 가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 수준의 안목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촉감(觸感)이란 것은 나름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온 나라의 명찰(名刹)ㆍ고찰(古刹)을 드나들며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한글날 맞아 돌아보는 소쇄원 제월당의 편액들

편액 사이에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안내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 소쇄한 원림이 유벽하고 / 瀟灑園林僻 청진한 지개가 유원하였네 / 淸眞志槩悠 꽃을 심으니 따뜻한 꽃잎이 열리고 / 栽花開煖蘂 물을 끌어대니 맑은 물결 부딪히네 / 引水激淸流 고요하고 가난한 것 싫어 아니하고 / 靜與貧非厭 한가로이 늙는 것 걱정하지 않았네 / 閒仍老不憂 어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 那知遽觀化 슬프게도 흰 구름만 떠 있네 / 怊悵白雲浮 - 고봉전서(高峯全書) 고봉속집 제1권 ‘모인에 대한 만장’ 가운데 첫수- 지난주, 남들보다 한발 빠른 한가위 성묘차 지방에 내려갔다가 담양 소쇄원에 발길을 옮겼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깨끗하고 시원하다'라는 뜻이라는데 그 이름에 걸맞는 노래 같아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의 시를 골라봤다. 대충 내용은 알겠으나 ‘원림이 유벽’하다든지, ‘지개가 유원하다’라는 표현은 요즘 말이 아니라서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이 시는 평소 즐겨찾는 <한국고전종합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했다. 고봉 선생을 비롯하여 숱한 시인 묵객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은 제월당(霽月堂)에 내걸린 편액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모두 빼곡히 한자로 되어 있어

탱크훈련 하던 곳에 만든 국내굴지의 '고석정꽃밭'

2025철원 고석정꽃밭 가을개장, 11월 2일까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철원 고석정 꽃밭은 탱크가 기동훈련을 하고 포성이 가득한 군 훈련지였습니다. 주민들은 꽃을 심고 나무를 깎아 투박한 조형물을 만들어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고석정 꽃밭의 꽃들은 어린이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랍니다.'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2025 철원 고석정 꽃밭 가을개장' 홍보물 -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포천 사는 동생을 만나러 갔다. 서로 사는 일이 바빠 거의 반년 만에 만난 동생은 가까이에 유명한 꽃밭이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동생 집에서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 꽃밭 이름은 '철원 고석정 꽃밭'이다. 처음에 꽃밭을 보러 가자고 했을때 내심 대단한 꽃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냥 선정호수나 걷자'라고 했는데...아뿔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 건너편에 펼쳐진 끝없는 꽃밭이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은 맨드라미, 노랑 맨드라미, 천일홍, 백일홍, 보랏빛 버베나, 가우라, 해바라기, 코스모스, 핑크뮬리, 억새, 코키아....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꽃밭이 황홀하여 연신 탄성이 터졌다. 가끔 뉴스에서 해바라기꽃밭이라든가, 백일홍꽃밭, 샤스타데이지(구절초 모양의 꽃)

진도에 있었던 또 하나의 '고려국'

진도 용장성을 둘러보고 754년 전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몽골병이 대거 내도(來到)하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격구장에 모여라” -고려사 열전 권43 배중손의 말- 동아시아 해상왕국 진도를 꿈꾸며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배중손(裵仲孫, ? ~1271, 고려원종 12) 장군이 활약하던 ‘진도 용장성(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2)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4시쯤인데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서인지, 흐린 날씨 탓인지 벌써 어스름 저녁 느낌이 들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 가운데 분지처럼 자리 잡은 용장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니 배중손 장군 동상이 우람차게 서 있다. 그 옆에는 장군을 모시는 사당과 업적을 기리는 '배중손 장군 항몽 순의비(殉義碑)'가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기자가 찾은 시각에는 찾는 이 하나 없이 가을의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진도 용장성(龍藏城)은 고려시대 말기, 원나라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 싸운 삼별초의 항전지이자, 또 하나의 고려 정부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삼별초는 고려 정부가 원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고려의 자주적 정통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항몽 세력으로, 1271년 강화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뒤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