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대나무가 잘 자라는 담양은 옛부터 죽제품의 고장으로 죽세공품인 돗자리을 비롯한 대바구니 등 생활용품들이 생산되었던 대나무의 고향으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담양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죽녹원"이 있어 국내 유일한 왕대숲의 푸른 대나무의 꺾이지 않는 절개를 느껴볼 수 있어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곳이다. 죽녹원에 가면 옛 대나무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이런 담양에는 백제시대부터 창건된 절로 알려진 천년고찰이 있으니, 그 절은 용흥사이다. 그런데 오래된 절로 알려지긴 하였지만 조선 이전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조선조 숙종(1674~1720)의 상궁이었던 숙빈최씨가 이 절에서 기도 한 뒤 영조를 낳았다고 하며, 영조가 등극한 뒤 이 절의 이름도 용구사에서 용흥사로 바뀌었다. 영조 이후 용흥사는 조선시대임에도 왕실의 도움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기울고 일본침략기를 맞이하게 된 19세기 말에는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호남에서 일어난 죽창을 든 의병들의 본거지가 되어 일본군에 의하여 용흥사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1930년 대에는 근처 백양사의 승려인 정신스님이 대웅전과 유사채를 세웠으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은 전국적으로 찾아 보아도 매우 귀한 벅수지만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마을이 있는 곳에는 마을의 입구에는 벅수들이 세워졌었다. 벅수는 주로 나무로 만든 것이 많지만 더러는 돌로 만들어 졌는데, 마을입구에 세워놓고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벅수는 자연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존재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을마다 벅수를 세워놓고 사람보다 능력이 뛰어난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형상을 사람의 모습으로 새겨놓고 마을의 원로들이 앞장서서 제사를 지내고 무당을 불러 신통력을 부여하였다. 벅수 옆에는 큰 당산나무도 있었다.,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의 건강, 출산, 풍년 등 비손하는 제사를 지내고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이 되면 마을잔치를 하였으며,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을어른을 존경하고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정신적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벅수는 민속자료로 토속적 조형물로만 남아있는 현재에 이르렀다. 이제는 그 능력을 모두 상실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세우고 자신들을 보살펴주는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귀하게 여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의 인접도시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청계사는 수도권 동산객들이 많이 찾는 절이다. 청계사는 처음 창건시기를 신라말기로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이후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0년(1284)부터다. 이때 조인규(1227~1308)는 막대한 사재를 들여 조씨의 원찰로 청계사의 중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인규는 본래 이 지역의 변변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원나라 간섭기 몽골어를 잘 배워 43세 충렬왕이 세자시절 세자를 모시고 통역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오면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딸(제국대장공주)이 충렬왕의 왕비가 됨에 따라 조인규는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잘 섬겨 공주세력을 바탕으로 상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로 부터 신임을 얻어 원나라의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엿다. 그 뒤 1292년 자신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의 유력한 존재가 되었고, 1298년 사위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실의 측근이 되어 더욱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인 계국대장공주를 왕비로 삼은 상태로, 계국대장공주와 조인규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화성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염거화상은 신라 구산선문의 최고 가람인 가지산파를 개창한 도의국사의 직계제자로 가지산파 2대조사로 신라 문성왕6년(844)에 입적하였다. 현재 용주사는 창건당시에는 갈양사(葛陽寺)였다. 염거화상은 당대 덕망이 높은 선승으로 갈양사를 선(禪) 수도도량으로 하여 많은 수행승들을 배출하였다. 갈양사는 이후 고려시대에는 혜거국사가 중창불사를 단행하였으며, 고려 태조의 요청에 따라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어 국가적 축원도량으로 발전하였다. 혜거국사 당시에는 고려왕실의 요청에 따라 수륙대재(육지와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극락천도를 위한 천도재)를 거행하여 지금 용주사의 대표적 법회로 자리잡았다. 수륙대재는 지구상 지배자인 사람은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있는 모든 존재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넋을 위로하고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에게 불법을 널리 펴는 천도의식이다. 그 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용주사는 임진, 병자 전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축물이 불타서 폐사되었으나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 화산으로 옮기면서 융릉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난 6월 15일(일) 미얀마,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스리랑카, 몽골,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살고있는 아시안 친구들을 위로하는 잔치가 강화도 천년고찰 전등사 경내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아시아인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이번 잔치 한마당은 올해로 20회째를 맞이했다. 아시아 각 나라에서 한국에 와서 살면서 어려운 타향살이에 몸도 마음도 고달프지만, 한국의 색다른 다양한 문화를 통해서 한국을 느끼고, 한국과 다른 문화를 꽃피웠던 자신들의 문화도 자랑하며 자신들의 정체성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의미깊은 자리였다. 전등사에서는 이날 멀리서 온 아시아 친구들을 위하여 마당에 무대를 만들어 멍석을 깔아주었고, 한국음식을 마련하여 1,000 명이 넘는 점심식사를 제공하였으며, 축제에 앞서 타향살이에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하여 병의원의 협조로 진료로도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2006년 처음으로 행사를 열어 올해 20회째를 맞이한 이날 행사는 한국문화와 아시아문화가 서로 어울려 우정이 넘치는 뜻깊은 자리였다. 코리안드림을 찾아 떠나온 아시안들, 그 가운데 군사계엄 상황으로 힘들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산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남쪽도시로 현재 인구 70여만명이다. 안산(安山)이란 평야가 넓어 사람이 편안하게 살수 있는 좋은 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옛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그런 안산에는 조선말 실학의 선구자로 성호 이익선생(《성호사설》 지음)이 있었고, 조선 후기 정조시절 활약했던 풍속화가로 이름높은 단원 김홍도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절 농촌계몽가로 짧은 생을 살고간 독립운동가 최용신 등이 있다. 심훈이 지은 상록수란 소설은 최용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안산시는 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단원구와 상록구로 나뉘게 되었는데, 단원구는 김홍도를 상록구는 독립운동가 최용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은 1970년대 한국이 공업화를 하면서 반월공단이 들어서면서 공업지대가 형성되었고, 그 이후 인구가 급속팽창하는 가운데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들어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 안산에는 시흥시 오이도에서 대부도까지 시화방조제가 설치되어 매우 넓은 인공 호수가 생겨났는데,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자 주변에서 배출한 생활폐수가 모여들어 한때 호수의 물이 썪어 환경오염이 심각하여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어느덧 초여름이다. 녹음이 슬슬 짙어지는 계절, 전등사 경내를 장식하고 있는 검붉은 작약꽃이 카메라를 든 작가들을 유혹한다. 작약은 한방에서 귀한 약재로 쓰기도 하지만, 5월 말이면 화사하게 피어난 꽃송이가 청순한 듯 맑고 깨끗하면서도 정열적으로 느껴져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는 꽃이다. 작약꽃은 노란 수술을 둘러싼 큼지막한 꽃잎이 매혹적인데 색깔은 검붉은 자색, 알록달록한 색, 흰색 등이 있다. 원래는 꽃술 주변에 한겹으로 꽃잎이 피어나지만 요즈음에는 개량종이 나와 겹꽃들도 많이 눈에 띈다. 강화도 전등사는 고구려시대에 창건한 절로 마니산 남쪽에 있으며 군사유적으로 정족산성이 있는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화 정족산성의 남문은 전등사의 출입문이기도 하며 정족산성은 단군의 아들이 쌓은 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초여름을 알리는 아름다운 전등사의 정열적인 검붉은 작약꽃을 보면서 새시대 새정치를 기대해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9(2025)년 부처님오신날을 기려 (사)한국불교사진협회 정기 회원전이 열린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을 중심으로 열리는 회원사진전으로 올해는 주제를 <미소>로 정하여 다양한 영상으로 작품화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회원들은 각자 자신이 발견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한국인이 조성한 다양한 부처님, 보살님, 아라한들은 물론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스님들의 모습 속에서도 아름답고 편안한 미소라면 모두 작품의 대상으로 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미소는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표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특별한 감정의 표현인 미소이지만, 특히 불교에서는 그 의미가 크다. 불경에 전하는 미소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한,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던 때, 부처님의 말없는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가섭존자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말이다. 2,600여년 전, 어느 날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다가, 문득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연꽃 한송이를 들어서 설법을 듣고 있던 대중에게 들어 보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매는 붉은 색의 홍매화로 백양사를 대표하는 고목이다. 나무의 나이는 350년 이상이 되는데 매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백양사를 매화향으로 감싸고 있어 많은 탐방객들이 매화향기를 맡고자 찾아온다. 백앙사 고불매는 오직 한그루의 고목 홍매화를 이르는 이름으로 나무의 높이는 5.5m 정도로 나무 밑둥에서 4갈래로 뻗어나와 갈라졌는데, 자라나면서 나무가 갈라져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 본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1864년 대홍수로 절을 옴겨지으면서 홍매와 백매 한그루씩 옮겨 심었는데 백매는 죽고 홍매만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백양사 고불매는 1947년 백양사의 만암 대종사 스님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할 때, 이나무가 고불의 기품을 닮았다고 하여 '고불매'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불(古佛)이란 옛날 부처 곧 석가모니불을 뜻한다. 백양사는 해마다 매화가 피어난 시기를 맞추어 고불매 축제를 펼친다. 올해는 3월 29~30일 열었다. 현재 백양사 고불매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봄의 전령 매화가 피어났다. 겨울내 나라가 온통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핵사건으로 움츠려들어서인지 해마다 3월 중순이면 피던 매화가 올해는 4월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꽃망울을 터트렸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는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을 정도로 그 자태가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온나라 절에는 많은 매화나무가 있고, 특히 한 두그루 유명세를 타는 유서깊은 매화나무가 있는데 특히 순천 선암매는 한국의 유명한 매화꽃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힐 정도로 매혹적이다. 선암사에는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에 피어난 20여 그루의 매화나무 있는데, 그 가운데 300년 이상 자라나 고목이 된 백매와 홍매 각 1주가 한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를 '선암매'로 부른다. 이 선암매는 고려시대 중건한 전각의 상량문에 선암사의 와룡송과 함께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 선암사의 흥망을 지켜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선암매는 고려 천년의 후손 나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현재 선암매 주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은 매화나무 말고도 선암매의 후손에 해당하는 20여 그루의 매화가 자라나고 있어 이 계절이 되면 선암사를 온통 매화향으로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