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이날의 여행 일기를 간추려 본다. - 아침 8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9시에 주막(수원 대황교 주막) 출발 - 아침 10시 오산천 옆의 오미장터에 도착. 300여 채의 집이 있는 마을의 큰 장 - 낮 11시 50분 진위(현 경기도 평택시 북쪽)의 태실 마을에서 휴식. 새뚝거리 주막이 있음 - 낮 12시 12분 진위 도착 - 낮 2시 52분 언덕 꼭대기서 쉼, 간단한 식사. 기압은 30.026, 기온은 16도. 3시 8분 출발 - 저녁 4시 52분 소사(素沙, 평택의 옛 이름) 주막에 듬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 4월 3일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한 마크롱 여사가 꼭 보아야 할 것을 놓쳤다. 1402년 조선에서 그려진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이 지도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에서 2008년 프랑스어판으로 펴낸 《인류의 역사》 제4권(600-1492)의 표지를 장식한 놀라운 지도다. 이 지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유홍준 관장은 마크롱 여사에게 이 지도를 소개하지 않았다. 마크롱 여사가 자기 나라의 유네스코에서 펴낸 《인류의 역사》 표지에 오른 지도의 실물을 보았다면 어떤 효과가 일어났을까? 아마 프랑스 언론의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유네스코의 시선을 끌었을 것이고 세계 언론에서 다루었을 수도 있다.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지구촌에 알리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한껏 높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황금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그 지도를 꼭 보아야 했을 까닭은 또 있다. 이 지도에는 놀랍게도 파리를 비롯한 몇몇 프랑스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파리는 ‘法里昔’(우리 발음 ‘법리석’, 중국어 발음 ‘파리시’)으로 새겨져 있다. 거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다. 지도는 여행의 기록이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1월 1일 아침 8. 58 : 서울 갓전골 입동(수표교 근처)의 집에서 출발 ▶ 갓전골 : 조선 시대 수표교 부근 '갓전골'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과 관철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갓(冠)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많아 갓전골(갓전골)이라 불리게 된 지역이다. 9. 58:- Pa-chon-kori 도착 10. 40: 동작 나루를 건너 관악으로 향함 11. 9 : 승방돌 도착. 승방돌은 서울에서 20리, 과천까지는 10리 12. 29 : 과천의 끝 도착 낮 1.25 : 갈뫼(갈산)에서 휴식 2.10 : 사근내Sakunae(沙斤乃) 도착 ▶ 경기도 ‘사근내(沙斤乃)'는 오늘날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사근내' 또는 '사그내'는 오전동, 왕곡동 등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울을 뜻하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자 표기로는 사근내(沙斤乃) 또는 사근천(沙斤川)이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평사천(平沙川), 고정동(古亭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등이 합쳐지면서 '고천리(현재의 고천동)'가 되었다. ‘사근내(沙斤乃)'의 역사적 역할 (사근내원-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1일부터 44일 동안 한강 이남의 조선 남부를 탐사했다. 대학노트 약 350쪽을 여행기로 가득 채웠다. 삽화도 다수 그려 넣었다. 수많은 주막에 들렀다.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사람도 당시 그처럼 많은 주막을 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여행기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도 ‘주막’인 것 같다. 그가 숙박한 주막을 중심으로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먼저. 그가 여행기 첫 쪽에 적어 놓은 여행단 내역을 보겠다. (뒤침) 우리 여행단은 다음과 같다: 조지 C. 포크 미국 해군 소위 전양묵, 양반 정수일, 조지 포크의 수행원 가마꾼 12명 말몰이 소년 2명(11월 5일 공주에서 한 명이 추가되어 3명이 된다) 하인 1명 총계: 18명의 인원에 2필의 말, 3대의 가마 5 상자의 트렁크, 3개의 손가방, 사진기, 삼각대, 총기 상자, 돈 바구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5살의 조지 포크를 만나 보자. 해군사관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자기 동생(포크의 삼촌)에게 거침없이 자랑하는 편지다. 매우 긴 편지의 손글씨 판독이 썩 어렵다. 오래 뚫어본 결과 거의 완파하였다. 번역문을 여기에 올린다. 1872년 6월 20일 마리에타에서 친애하는 조지 사관생도 조지 클레이턴 포크를 소개하려네. 나는 방금 아나폴리스에서 돌아왔네. 거기에서 녀석이 학교용 군함 산텍호(US S School Ship Santec)에 승선하는 것을 보았네. 이제 그 자초지종의 역사를 기술하려 하네. 5월 초 우리 지역 의회의 의원인 디키(Dickey)가 카운티 신문을 통해 밝혔다네. 곧 랑카스터 지역에서 14살에서 18살 사이의 모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선발시험을 열어 가장 우수한 인재를 한 명 뽑아 해군사관학교 생도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디키 의원은 브룩스 교수, 에반스 교수 그리고 헤이스 판사를 심사 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체검사는 블랙우드 박사에게 위촉했다네. 이 소식을 나는 아들 녀석에게 알려주면서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 “아빠, 딱 제게 맞군요, 도전해 보고 싶어요.” 하더라구. 나는 녀석를 데리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2월 중순 조지 포크가 사경을 헤매던 중 고종이 보낸 관리를 만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그 날짜 일기다. 12월 13일 8시 19분 주막(경기도 이천)을 나섰다.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날씨가 카랑하다.(쇳소리처럼 높고 맑다) 4리 정도를 간다. 언덕을 넘는다. 가마꾼들이 흔연하다. 그들이 견뎌내는 게 내겐 경이롭다. 길 위에 농부 몇 명이 보인다. 10시 2분에 5분 동안 휴식을 취하다. 좁은 골짜기를 내려간다. 나무가 많다. 가마꾼 턱수염 위에 얼음이 맺혀 있다. 11시 48분 어떤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다. 가마꾼들이 술을 마신다. 길이 양호하고 평탄했다. 하지만 인적은 드물다. 12시 38분 길가에서 휴식. 이곳까지는 길이 내내 좋았다. 우리는 지금 북서쪽으로 뻗은 골짜기 안에 있다. 금릉위 박영효가 그저께 인천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서울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길에서 들었노라고 수일이 말한다. 1시 36분 출발한다. 곧 저쪽에서 큰 외침 소리가 들린다. ‘어명이다. 멈춰라!’. 나의 가마가 내려진다. 겁에 질린 가마꾼들이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저쪽에선 전양묵이 가마 속의 관리와 무언가 말을 나누고 있다. 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이 지도는 1872년에 만들어진 경기도 광주 지도 일부다. 방향은 왼쪽이 남쪽이고 위쪽이 서쪽이다. 이 지도에서 오른쪽 맨 위에 남한산성의 동대문이 보인다. 보다시피 산수화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지리 정보를 잘 갖추고 있다. 유심히 보면 주막(酒幕) 정보가 많이 보인다. 위에서만도 4개의 주막을 찾아볼 수 있다. 조지 포크는 1884년 12월 13일 이천의 주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여행기에 세밀화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그 여정이 지도상에서 어디일까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여기 1872년도 지도를 보니 감이 어느 정도 잡힌다. 사경을 헤매던 그가 기적처럼 임금이 보낸 관리(선전관-宣傳官)를 만났던 길, 그리고 그들의 안내로 묵었던 주막을 이 지도에서 가늠해 보았다. 어명을 들고 나타난 관리를 만나는 이적이 일어난 곳은 보라색 네모 친 구간의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또한 그들이 만난 뒤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묵었던 주막은 보라색 물방울 모양을 친 곳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한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조선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선인의 마음속 깊은 곳을 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정부가 잘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여기 와 있는 외국인들이 비행을 저질러도 그들을 손님으로 여겨 모른 척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서양인들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겁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조선민족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침략이라도 당한다면 그들은 끝장을 보고 말 겁니다. (1885.5.4 부모님 앞 편지)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우리의 의병과 독립군은, 포크의 말대로 끝장을 보고 말 것이었다. 지난해 2025년(민기-民紀 원년)엔 내란세력에 의하여 또 침략을 당했다. 그리고 끝장을 보고 말았다. 포크는 그것을 ‘미리 보기’ 한 게 아닌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제물포에 입항하기 일주일 전인 1884년 5월 21일 나가사키에서 조지 포크는 난생처음으로 조선 음식을 먹어본다. 그 소감을 고국의 가족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리운 부모님, (…) 오늘 저는 조선 친구들을 보러 갔습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unboundedly glad to see me). ……그들이 제게 코리아 음식(Korean meal)을 대접했답니다. 매우 맛있었어요. 일반 외국인의 입에는 그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일본 음식보다 유럽인의 구미에 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의 여느 외국인과 달리 조선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극동지역의 모든 생활 방식에 이상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죠. 코리아 음식이 그렇게 좋다는 걸 발견하고 저는 무척 기뻤답니다. 걱정했거든요. 조선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걱정은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곳 나가사키를 떠나면 저는 정말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이후로는 모든 편지가 생소한 장소에서 발송될 겁니다. 이 편지가 트렌턴호의 해군 소위로서 보내는 마지막 소식이 되겠군요. (…) 이제 우리는 조지 포크 그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7일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본다.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 곁에 관련 정보를 세밀히 기록해 놓았다. 모자 부분의 끝에 달린 고리의 도안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과학성과 미학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포크는 이 날짜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은진(unjin) 고을에서 미륵상으로 가는 길은 대체로 북쪽 방향이다. 풀이 자란 언덕을 넘어가 굽이진 길로 5리 거리였다. 언덕에 무덤이 매우 많았고 다랑이논들도 보였다. 차츰 내리막길로 내려가 들가에 이르렀다. 언덕 정상 부근에는 화강암 바위들이 솟아있다. 미륵상은 평야 위로 솟은 동산의 100피트 30m가량 높이에 세워져 있다. 미륵상의 이마에는 황금 명판이 새겨져 있다. 지름이 10인치(25cm)는 되어 보였다. 그 가운데에 수정구슬이 박혀 있다. 모자 부분이 무척 크고 아래 면으로 조각이 잘 되어있다. 나는 6장의 사진을 찍었다.” 다음에는 사진을 감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