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은 1886년 여름 일본 정부에 의해 연금 상태에 있었다. 곧 7월 25일부터 그는 일본 당국의 감시하에 요코하마의 미쓰이 여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삼엄한 경비를 했다. 그때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시키기로 한 상태였다. 그해 8월 7일께 오사사와라 행 정기 여객선 슈코마루호는 김옥균 일행을 태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이틀 뒤 8월 9일 출발할 것이다. 그날 새벽부터 여관 주위에 30여 명의 일본 경찰이 철통같은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몇 명의 경관이 김옥균을 여관방에서 끌어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김옥균 선생을 추방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김옥균과 같이 있던 동지들인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이윤고 등 네 사람이 격렬하게 항의한다. 경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옥균을 부둣가로 끌고 간다. 네 사람의 망명동지는 김옥균의 어깨를 부여잡고 통곡한다. 경관들이 그들을 거칠게 떼어낸다. 김옥균을 태운 배가 멀어진다. 아침 6시 반이었다, 김옥균과 동행을 고집하며 두 명이 배에 올라탄다. 한 명은 조선인 이윤고, 다른 한 명은 일본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1875년께의 한양으로 시공여행을 떠나 본다. 여행에 앞서 8년 전에 돌아가신 역사학자 강재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항상 유의해 온 기본 관점은 우리나라를 은둔의 나라, 정체의 나라로 보는 통속적이고 그릇된 사관을 타파하고, 거친 격랑 속에서 고투해 온 우리 선조들의 생동하는 숨결과 그 발자취를 밝혀서, 근대 민족운동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민족의 얼은 만천하에 현창(顯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파란노도의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가면서 사고하고 행동한 한국 민중의 애환을 되새기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깊이 파헤쳐 보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해 두어야만 하는 것은 극히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한국 근대사는….. 근대 일본의 대한관계사(對韓關係史) 속에 해소되거나,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사 속에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헤쳐 나간 발전의 역사라는 점이다. “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한 조각의 자주성도 없는 괴뢰적 <친일파>인 양 결론 짓는” 일인 학자들의 주장을 강재언은 비판하면서 “한국사의 전과정을 일관하는 내재적 발전 법칙을 부정하는,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평양에서 김옥균 연구서 《김옥균》을 펴낸 것은 1964년이었다. 그것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출판한 것은 그로부터 26년 후인 1990년이다. “이 책은 이미 1964년에 나온 것으로서 26년이라는 시간이 경과된 지금 어쩌면 고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후 북한 역사학계의 근대사 서술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1968년 일본에서 번역. 출판한 이래 일본은 물론 심지어 남한 역사학계의 근대사 연구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아직도 이 책이 지닌 의의는 손상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주진오) 주진오의 논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1955년 12월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의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를 알아야 하며…..” 이로부터 3년 뒤인 1958년 3월.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회 연설에서 “주지하디시피 일본은 동양에서 최초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일성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북한은 찬양하기에 급급해한다. ‘아니요.’라고 말할 자유가 없을 뿐 아니라 침묵도 허용되지 않는다. 남한에서는 어떠한가. 역시 자유가 없다. 김일성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흔들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욕설에 가까운 반대부터 해야 한다. ‘고려연방제’만 해도 그렇다, 그 내용을 알아보는 것 자체가 위험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이 “쌀밥이 역시 최고야”라고 강조했다고 치자. 북한 주민들은 ‘보리밥이 더 맛있어’라고 말할 자유가 없어진다, 남한 사람들도 자유가 제약받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쌀밥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러하니 분단체제 아래에서는 북이나 남이나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다. 김일성이 김옥균을 높였을 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북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다. 맹목적인 교조주의에 빠진다. 남한 학자들도 불편해진다. 가만히 있으면 김일성에게 동조한다고 의심받을까 봐 께름칙하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 한국 학자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김일성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옥균은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홍종우가 쏜 총탄에 쓰러졌다. 그 순간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호방한 기백과 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상하이행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일본 청년 미야자키 토오텐(宮﨑滔天)이 김옥균에게 상하이행의 위함성을 걱정하면서 동행하겠다고 하자 김옥균은 이렇게 말한다.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지 않고서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는 없다. 청나라 이홍장은 나를 속이려 할 것이지만 나 또한 놈을 속이려고 배를 탄다. 그를 만나 내가 곧바로 죽임을 당하든가 감금되어 버린다면 만사 끝나버리겠지만, 5분이라도 담화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하튼 문제는 한 달 안에 결판날 것이다. …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자. 오늘 밤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 글은 미야자키 토오텐의 자서전에 들어 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이홍장과 담판하러 호랑이 굴로 향했다. 호랑이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아시아의 나아갈 바에 대한 자신의 구상, 이름하여 ‘삼화주의(三和主義)’였다. 조선ㆍ중국ㆍ일본의 세 나라가 구미열강의 식민제국주의로부터 자주독립을 지키고 발전하기 위하여 상호 연대협력 하자는 것이다. 그는 물론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K-민주주의의 원년, 이 특별한 해에 잘 호응하는 책 권태면의 《가지 못한 길》이 나왔다. 이 책 《가지 못한 길》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길을 간다. 민족의 역사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흘러간다.” 이 책을 낸 권태면은 외무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엘리트 외교관이다. 그는 높은 관직에의 욕망보다는 지식인의 고뇌를 품고 살아온 서생 외교관이다. 그동안 그가 썼던 책을 보아서 그렇다. 《밖에서 바라본 한국》은 한국의 사회문화를 내부자와 외부자의 두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 역사 속의 외교관》은 신라 이래 우리 역사에서 외교활동을 한 인물들을 탐사한다. 《북한에서 바라본 북한》은 그가 업무상 북한에 살면서 쓴 체험적 관찰기이다. 《구별연습》은 그의 시를 엮은 시집이다. 나는 그의 외교부 동료이자 애독자다. 이번에 나온 《가지 못한 길》은 분단체제 속에서 고뇌하는 한 외교관이 오랜 숙려 끝에 세상에 내놓은 노작(勞作)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소위 외교관으로 35년을 살았다. 그것은 늘 세계지도를 옆에 두고 보면서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보는 직업이었다. … 수십년간 남북의 외교관들은 수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동경 주재 영국 엘리트 외교관 사토우(Satow)가 고베 주재 동료 외교관 스톤(Aston)에게 보낸 1881년 8월 23일 자 편지다. “이동인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는 정말로 미로운 인물이니까요. 만일 목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 나라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겁니다. (I hope the information that Tong-in has arrived at Nagasaki may prove to be correct, for he is really a very interesting man and if he can keep his head on his shoulders, pretty sure to make his mark in the history of his country.)” 사토우는 다음 해인 1882년 6월 12일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김옥균, 서광범 그리고 탁정식과 저녁식사를 하다. 그들은 매우 서글서글하고 입담이 좋다. 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이다. 이태리 피에몬트(Piedmont)인과 피렌체 사람이 대조적이듯이 그런 인상을 준다. 식사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 원년 4월 4일 내란 우두머리 파면 선고가 천하를 울릴 때 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친손자다. 삶의 마지막 기간을 오늘날 헌법재판소 경내의 백송나무 자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환생하여 북을 치고 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헌법 재판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목소리, 집단지성의 공명이었다. 그 시원을 찾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의 홍익인간까지 이른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가깝게 근세 여명기의 환재 박규수에서 찾는 게 더 실감 날지 모른다. 그는 놀랍게도 20대 초에 근 200년 뒤의 한국을 내다보았던 것만 같다. “무당이 발호하거든 나라가 망할 때가 온 것임을 알라.” 그가 20대 초, 1830년 어름에 썼던 다음 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골짝과 덤불과 시내와 늪은 때로 사(邪氣)를 뿜고, 벌레와 물고기와 나무와 돌은 오래되면 요물이 되어, 이매망량과 같은 도깨비로 변한다.(…) 이것들이 왕왕 세상에 나타나 백성들의 재앙이 된다. 그러자 요사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원년 곧 서기 2025년은 을사늑약 120년이 되는 해다. 천길나락이 솟아올라 빛의 영봉으로 탈바꿈하는 진풍경을 우리는 날마다 아니 시시각각 보고 있다. 민주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이 기적 아닌 기적은 과연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쩜 단군의 홍익인간에서 발원한 K-파동(WAVE)일지도 모른다. 좀 더 가까이는 1884년 말 삼일천하로 끝났던 갑신혁명,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1898년의 만민 공동동회, 1919년의 3.1만세운동,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줄기찬 반제 항일 독립투쟁, 광복 뒤의 4.19, 5.18, 6월 혁명, 촛불 혁명 등의 애끓은 물결이 큰 욧솟음으로 하늘 높이 솟구친 것일지도. 내란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우리 등 뒤에 있다.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망각하는 순간에. 내란 요괴들은, 우리가 민전 1년(서기 2024년) 겨울밤의 그 어둠과 공포를 망각하는 순간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마냥 승리에 도취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이 해를 민기 원년으로 하는 새로운 연기를 쓰자는 뜻도 여기에 있음은 물론이다. 민기는 어느 정파, 집단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으로부터 근 140년 전 어느 한때 서울의 종각 인근에서 둥지를 틀었던 한 미국 청년이, 어둠에 잠겨가는 조선왕국을 바라보며 애상에 젖은 글을 남겼다. 밤이 오면 어두운 남산 꼭대기, 봉수대(烽燧臺)의 불꽃이 줄지어 신속히 꺼진다. 남산의 봉홧불은 이 나라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뻗어 있는 제4 봉수로(烽燧路) 의 마지막 봉화다. 그 신호로써 사람들은 오늘밤 온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산 맞은편 궁궐의 임금은 왕국의 평화를 알리는 이 무언의 메시지에 안도하며 침전에 들 것이다. 잠시 뒤 도심의 큰 종에서 울려 나오는 부웅, 부웅, 부웅 소리가 나의 귓전에 닿는다. 사람들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며 밤에는 성문이 닫힌다는 신호다. 이 땅에 밤이 내리면 이처럼 봉홧불이 신호를 하고 큰 종이 밤공기 속에서 부웅부웅 소리를 내온 지 4백 년이 넘었다!( The signal has flashed out nightly, and the great bell has boomed thus in the night air nightly for more than four hundred years! ) 「출처: 카터 에커트(C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