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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암살을 모면하다

지운영은 호송되고 조선정부의 위신 크게 추락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48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6년 초 일본이다. 지운영이 고종의 위임장과 단도를 소지하고 일본에 와 있다. 김옥균을 암살하려 함이다. 김옥균의 심복 유혁로 등 세 사람은 지운영에 접근하여 위임장과 단도를 손에 넣는다. 그런 다음 경시청으로 가서 위임장과 단도를 증거로 제시하며 지운영을 고발한다. 경시청은 아연 긴장한다. 우선 김옥균에게 동경을 떠나도록 조치한다. 김옥균은 요코하마의 영국 조계지에 있는 그랜드호텔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을 사로잡을 방안을 알려준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찾아간다. 지운영에게 김옥균이 동경 체류를 금지당하여 요코하마로 이동했다는 것, 요코하마에는 치외법권이 있어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김옥균을 암살하기 편리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꼬임에 빠진 지운영은 요코하마로 들어간다. 그의 동정을 유혁로가 일본 경시청에 밀고한다. 거리를 두리번거리는 자운영을 일본 경찰이 체포한다. 구속된 지운영은 암살 밀명을 받고 도일한 사실을 자백하고 만다.

 

1886년 4월 29일 김옥균이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온다. 편지에서 김옥균은 지운영의 거동을 알리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운영에게 퇴거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조선정부에 연락하여 소환명령을 내리게 한다. 본국의 소환장을 받았을 때도 지운영은 자신이 농락당한 사실을 모른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일주일 정도 감금되어 있던 중에 본국의 외무부서(외아문)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역적 옥균을 살해하려는 일이 발각되어 일본정부에 붙잡혔음. 왕명의 위임장을 받들고 있음을 말했음. 구속되어 욕을 보고 있으니 선처 바람.”

 

지운영은 곧 호송되어 귀환한다.

 

이 사건이 알려져 조선정부의 위신이 크게 추락한다. 김옥균은 국가적인 수치로 여기고 통분한다. 분노어린 붓으로 임금에게 상소문을 쓴다. 지금 전해 오는 이 상소문에 대한 논평이다.

 

“국제정세를 논하고 원세개의 수중에서 농락되고 있는 국내정세를 개탄하면서 다시 국정쇄신과 인재등용을 상신하고 있는 이 상소는 애국충정으로 일관되어 있는 명문이다. ”(유종호)

 

김옥균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이번 음모에 원세개(이홍장의 심복)가 관여하였음을 비난하고 반성을 촉구한다.

 

김옥균은 일단 암살의 마수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냉담하다. 이토우(이등박문), 이노우에 등 정부요인들은 처음부터 김옥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노우에 외무대신은 면회 요청조차 거절한다. 반면에 후쿠자와 유기치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김옥균에 동정적이다.

 

일본 관리들이 김옥균을 멀리한 까닭은, 조선정부 및 청나라 정부와 불편한 문제가 야기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김옥균이 야당 인사 사이에 후원자와 옹호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에 지운영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추방하는 기회에 김옥균도 추방키로 방침을 정한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