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상의원’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던 공간 ‘상의원’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향한 대결이 조선의 운명을 뒤흔드는 영화였습니다. 순제작비 72억 가운데 의상비로만 10억을 썼으며 진연 장면에서 오아비 역의 박신혜가 입은 진연복의 무게는 40kg, 가체들은 20kg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놓고 국내 평론가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국내 관객들과 나라 밖 관객들에게는 평이 좋았다고 합니다. ‘상의원(尙衣院)’은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복식 일체를 관장하며, 재물과 보화를 관리하고 제조하고 공급하던 공조(工曹) 소속의 관아입니다. 이 관아에서는 일상적인 관례에 따라 매달 초하루와 보름, 생일, 명절, 절기에, 대전ㆍ대왕대비전ㆍ중궁전ㆍ세자궁ㆍ빈궁 등 각 전과 각궁에 정해진 물품을 진상하고, 가례(왕실의 혼례), 책례(상왕ㆍ대비ㆍ왕비ㆍ왕세자ㆍ왕세자빈 등을 책봉하던 의례), 존숭(임금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 능행(금이 능에 거둥함) 등 왕실 의례가 있을 때, 또는 임금의 명령이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였습니다. 《경국대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산(算) 잘 놓는 장자방(張子房)은 계명산 추야월에 옥통소를 슬피 불어 팔천제자(八千弟子) 해산할 제, 때는 마침 어느 때뇨. 구추삼경(九秋三更) 깊은 밤에 하늘이 높고 달 밝은데, 외기러기 슬피 울어 객(客)의 수심(愁心)을 돋워 주고 장자방의 사향가(思鄕歌)를 부는 퉁소가락이 얼마나 애절했으면 항우(項羽)의 8천 군사가 일제히 전의(戰意)를 잃고 항복하고 말았을까요? 퉁소를 퉁수, 또는 퉁애라고도 하는데 이 악기는 단소에 견줘 보다 굵고 긴 세로악기여서 저음을 내고 있지만, 대금처럼 청공(淸孔)이 있어서 그 음색이 매우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흥겹고 장쾌한 가락이나 리듬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힘을 지닌 악기기도 합니다. 원래 소(簫)라는 악기는 위가 열려있고 밑은 닫혀 있는 세로 부는 관악기지만, 퉁소는 위와 아래가 통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퉁소를 연주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북청사자놀음의 반주음악이나 시나위 음악을 통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현재 함경남도 무형문화재 퉁소 신아우(북한에서 옛날부터 널리 연주 보급된 민속 기악곡) 예능 보유자는 동선본 선생입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10년 오늘(9월 10일)은 시인이자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 한일병탄으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28살 때 보거과(保擧科,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에 응시해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낮췄습니다. 이에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선생은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 구례로 내려왔지요. 이후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라는 뜻이 담긴 구안실은 선생의 문학과 학문의 산실이었지요. 그곳에 16해 정도를 살면서 무려 1천 수가 넘는 시를 지었는데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김)이 아닌 절의를 지킨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주로 읊었습니다. 그런 선생은 한일병탄이 되자 “훗날 이런 치욕의 날 누구 하나 책임감 있는 행동을 안 한다면 그것 역시 치욕이다.”라는 말을 토했습니다. 그 뒤 9월 10일 선생은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마저 찡그리니 / 무궁화 세상 이미 빼앗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장승과 벅수에 관해서 헷갈립니다. 그러나 쟝승은 길을 가는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만들어 세운 단순한 기능의 ‘푯말’(이정표)로 ‘우편제도’가 도입된 뒤인 1895년 기존 ‘역참제도’가 기능을 다하고 폐지되어, 임무가 끝나 우리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장승에는 늘 이 마을에서 어디까지는 몇 리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벅수는 얼굴이 험악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중국땅'에서 몰려오는 무서운 '역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역병'과 '잡귀'들의 고향땅 중국을 다스리는, 무섭고 힘센 임금이나 ‘장수’의 모습을, '벅수'로 표현하여, 거꾸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벅수는 투박한 모습을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가 매우 귀한 벅수지만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마을의 들머리에는 벅수들이 세워졌었지요. 벅수는 주로 나무로 만든 것이 많지만, 더러는 돌로 만들어졌는데, 마을 들머리에서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벅수는 자연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존재였지요. 벅수 옆에는 의례 큰 당산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께서 그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큰 공을 생각하여 강성군(江城君)을 추봉(追封)하였으며 태종조(太宗朝)에서 서원(書院)을 세우라 명하였고, 세조조(世祖朝)에서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으며, 충선(忠宣)이라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는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년) 9월 5일 문익점에 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훔쳐 왔다고 배웠습니다. 물론 위 기록에서 ‘문익점이 목면을 몰래 가져왔다’라고 돼 있는데 다른 기록을 보면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태조실록》 7년(1398년) 6월 13일 기록에는 “문익점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어지는 《태조실록》 기록에는 중국 승려가 조선에서 목면을 보고는 기뻐 울기까지 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목화가 금수 품목이 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2년 전(1923년) 오늘 9월 1일은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입니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날의 대지진을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関東大震災)라 부르는데 우리는 이날을 조선인 관동대학살의 날로 기억합니다. 관동대지진은 일본이 명치유신 뒤 근대사회로 진입하여 맞이한 가장 큰 재난이었습니다. 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도쿄 일대가 잿더미로 변하는 등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에게 학살당하는 만행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 학살당한 조선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간지인 《독립신문》에 발표된 학살자 수는 6,661명에 이릅니다. 경찰이 계엄령을 선포한 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유언비어가 경찰에 의하여 유포되었고 일본 민간인 자경단(自警団)이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한 것입니다. 그때 요코하마, 아라카와 강변, 치바현 나기하라 등을 포함한 도쿄의 여러 곳에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지금도 도쿄위령당(납골보존) 지하에서 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15년 전 오늘(8월 29일)은 일제의 강압과 친일파의 결탁으로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딱 한 번,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날, 경술국치일입니다. 그 뒤 35년 동안 우리 겨레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나라 밖 곳곳에 흩어져서도 해마다 국치일이면 세끼 밥을 굶었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아픔과 치욕을 각별하게 기억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상해임시정부도 국치일을 5대 기념일의 하나로 정해 해마다 행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광복 이후로 국치일은 달력에서, 그리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국치일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날을 뭐 하러 굳이 기리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2차대전 패전일을 기억하려는 일본, 난징대학살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중국,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고난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등을 우리는 봅니다. 역사를 잊는 겨레는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기억해야만 뒷날 다시는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우리문화신문> 독자에게는 국치일 말고도 어제 세상을 뜨신 이무성 화백님을 길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 화백님은 2007년 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광통방(廣通坊, 현재 중구 서린동 근처) 부근에 있던 큰 다리 대광통교(大廣通橋)를 건너면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여 나라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요품을 조달하던 시전(市廛)이 있었습니다. 이 육주비전에는 “여리꾼(列立軍)” 곧 거간꾼들이 있었는데 “여리꾼”이란 “남는 이익(餘利)을 얻는다는 뜻”과 함께 종로 거리에 열 지어 서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면 흥정을 붙인다는 뜻의 열립꾼(列立軍)인데 요즘 말로 하면 호객꾼이고, 일본말에 뿌리를 둔 삐끼라고 쓰는 사람도 있지요. 토박이말로는 '주릅'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조선시대 시전상인은 대개 한 평 남짓한 좁은 터에 최소한의 상품을 진열한 데다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간판도 없었고, 심지어 값도 써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 상인과 손님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여리꾼인 것입니다. 여리꾼은 값을 비싸게 부른 다음 흥정을 붙이고 값을 조정한 뒤 상인이 원했던 것보다 높은 값을 받아서 그 차액을 챙겼던 것이지요. 이 여리꾼 가운데는 쌀 거래를 하는 감고(監考)가 있었고, 집이나 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열풍에 한국은 물론 온 세계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그에 더하여 ‘케데헌’을 만든 매기 강(한국 이름 강민지) 감독이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만나고 기자회견을 열면서 언론은 ‘케데헌’ 기사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밝힌 후속작에 관한 생각을 언론들은 일제히 "후속편 구체적 계획 없지만...트로트 알리고 싶어"(스포츠조선), “한국의 트로트 알리고파”(문화일보), "후속편 기대 알고 있어, 트로트도 보여주고 싶다"(YTN), “다음 작품은 'K-트로트'?”(JTBC)이라는 제목을 달아 매기 강 감독이 후속작을 트로트로 정한 것인 양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자들의 얕은 생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보면 "K-POP 다음은 K-트로트ㆍ헤비메탈?!"(스포츠한국)이라고 하여 마치 이어서 보여주어야 할 우리 전통음악이 트로트나 헤비메탈인 것처럼 얘기하기도 합니다. 실제 우리 전통을 잇는 음악은 판소리나 민요, 정가 등인데도 이를 기자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실제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선인들의 말이 묵향처럼 퍼지는 날 아낙들은 눅눅한 옷을 볕에 말리고 선비는 그늘에서 책을 말리는 처서 위는 김영수 시인의 <처서> 일부분입니다. 내일은 열넷째 절기 처서(處暑)입니다. 말뜻으로 본다면 멈출 '처(處)'에 더울 '서(暑)'를 써서 '더위가 그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서가 지나면 모기입도 삐뚤어진다"라는 말이 있어서 이제 푸른 가을하늘이 저 멀리 다가올 듯합니다. 이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를 바람이나 햇볕에 말리는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사고(史庫)에 포쇄별관이란 벼슬아치를 보내서 눅눅해지기 쉬운 왕조실록을 말리도록 했습니다. 또한 선비들 역시 여름철 동안 눅눅해진 책을 말리고, 부녀자들은 옷장 속의 옷과 이불을 말립니다. 책의 경우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포쇄(曝)를 하지요. 때에 따라서는 음건(陰乾) 곧 그늘에 말리기도 하는데 “건들 칠월 어정 팔월”이라는 말처럼 잠시 한가한 처서 때 농촌에서는 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수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