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 여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까스로 마련되는 가을의 거점. 위는 정연복 시인의 <한여름의 입추>라는 시 일부입니다. 시인은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3번째 입추(立秋)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날입니다. 해가 지나가는 길인 황경(黃經)이 135°에 도달하는 때지요.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종요로운 때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입추가 지난 뒤 비가 5일 이상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바라는 기청제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는 비가 오기는커녕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위 시 <한여름의 입추> 뒷부분에는 “여름의 끝 아직 저만치 있어도, 가을 또한 첫발을 내디뎠으니. 익을 대로 푹 익어버린 한여름 속에, 머잖아 아기같이 가을은 생겨나리.”라고 언어의 농축을 합니다. 지금 불볕더위기 기승을 부려 열대야로 몸살을 앓고 온열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지만, 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리저리 떠도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길이 잘 든 말 1필을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책을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게 한 다음 안팎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광해군일기[정초본]》 32권, 광해 2년(1610년) 8월 6일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고, 임금이 속히 펴내라고 했다는 기록입니다. 《동의보감》은 허준(1539∼1615)이 16년 동안의 연구 끝에 완성한 책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했는데 총 25권 25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은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ㆍ곽란(토하고 설사를 하는 급성 위장병)ㆍ부인병ㆍ소아병 관계의 『자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길동이 절을 하고 엎드려 아뢰었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입어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고, 육축(가축)도 부모의 은혜를 아는데, 소인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옵니까?’” 이는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호부호형(呼父呼兄) 못 하는 서얼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입니다. 서얼(庶孼)은 조선 시대 양반 가문에서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를 통칭하는 신분 계급인데 그 가운데서도 양인(일반 평민) 신분의 첩이 낳은 자식은 서자(庶子)고, 천인(노비 등) 신분의 첩이 낳은 자식 얼자(孽子)라고 했지요. 서얼은 태종 때 도입된 서얼금고법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문과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연산군일기》 26권, 연산 3년(1497년) 8월 5일의 기록처럼 서얼이라도 의료 업무를 맡은 관청에 들어가려는 과거는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의공(醫工)은 천해서 오랫동안 선비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어찌 문ㆍ·무 양과(兩科)와 견줘서 흠이 있는 자를 모두 취택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신 등의 생각엔 신묘년 《대전(大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조선시대에 나라에서는 겨울에 한강 물이 4치 곧 약 12cm 이상 두껍게 얼면 예조의 지휘 아래 군인과 노비들을 동원해 얼음을 깼습니다(채빙). 얼음 한 덩이는 가로 4척(1척=약 30.3cm), 세로 6척, 두께 1척 이상의 규격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얼음을 뜰 때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아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지요. 그렇게 만든 얼음덩어리는 한강 가 두뭇개, 곧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의 동빙고와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용산 미군기지 안) 기슭에 있었던 서빙고에 보관하였지요.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나라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임금의 친척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주었는데 활인서의 병자, 그리고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서빙고의 얼음을 정당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 관리들에게 '빙표(氷票)'라는 얼음 교환권을 지급했습니다.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받을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러 규장각의 벼슬아치ㆍ승지(承旨)ㆍ홍문관의 벼슬아치 등에게 명하여 《일성록(日省錄)》을 엮게 하였다. 임금이 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날마다 쓰는 기록이 있어 말과 한 일을 기록하여 반성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다.(가운데 줄임) 증자(曾子)가 하루 세 번 자기 몸을 살핀 뜻을 따와서 그 책을 《일성록(日省錄)》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정조 24년에까지 이르렀으니 무릇 6백 75책이었다.” 이는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년) 7월 30일 자 《일성록(日省錄)》에 관한 기록입니다.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서문에 따라 《일성록》은 국정의 주요 현안들을 표제와 세부 사실로 나누어 기록하여 국정 운영에 참고할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체재로 엮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존현각일기’였던 것을 ‘일성록(日省錄)’으로 했지요. 이 책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蓑笠橫鋤細雨中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石田耨罷松陰裏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童驅牛羊驚我睡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위는 조선 전기 문신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삿갓에 도롱이 입고>란 한시(漢詩)입니다. ‘도롱이’는 농촌에서 여름날 비 오면 입던 재래식 비옷입니다. 도롱이는 지방에 따라 도랭이, 두랭이, 둥구리, 느역, 도롱옷, 드렁이, 도링이, 되렝이, 되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한자말로는 녹사의(綠蓑衣), 사의(蓑衣)라고도 합니다. 도롱이는 띠나 그와 비슷한 풀, 볏짚, 보릿짚, 밀짚 따위로 만듭니다. 안쪽은 재료를 촘촘하게 고루 잇달아 엮고, 거죽은 풀의 줄거리를 아래로 드리워서 빗물이 겉으로만 흘러내리고 안으로는 스미지 않게 한 것입니다. 농촌에서는 비 오는 날 나들이를 하거나 들일할 때 어깨, 허리에 걸쳤는데 비가 올 때 도롱이를 입고 머리에 모자처럼 대나무를 엮어 만든 대패랭이나 삿갓을 쓰는데 더운 여름날에 쓰면 시원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이 도롱이를 비옷만이 아닌 추위를 막는 방한구로도 썼습니다. 한편, 짚을 거적처럼 촘촘히 엮어 만든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무더위의 한가운데인 중복(中伏)입니다. 여기서 ‘복(伏)’ 자는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양으로, 가을철의 금(金)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다가 아직 더운 여름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한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이 복날을 '서기제복'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써서 복날은 더위를 피하는 피서가 아니라 정복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중복은 삼복의 둘째 날인데 하지 뒤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또는 삼복이라 합니다. 천간(天干: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ㆍ무-戊ㆍ기-己ㆍ경-庚ㆍ신-辛ㆍ임-壬ㆍ계-癸) 가운데 ‘경(庚)’이 들어간 경일을 복날로 삼은 까닭은, 경(庚)이 계절로 가을을 상징하는데 이날을 복날로 정해 더위를 극복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립니다. 그러나 올해처럼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걸리기도 하는데, 이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두째인 대서(大署)입니다. 이때는 대개 중복(中伏) 무렵으로, 올해는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아 사람들은 무더위(물+더위)로 고생합니다. 장마 때의 이 후텁지근한 더위를 우리는 무더위 말고 찜통더위 또는 가마솥더위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장마가 지나면 습도가 낮은데 더위가 몹시 심해 이를 된더위, 마른 더위, 강더위라고 하며, 더 심해지면 불더위, 불볕더위가 됩니다. “염소 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더위가 가장 심한 때죠. “쇠를 녹일 불볕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 가슴 헤치고 맨머리로 소나무 난간에 앉았노라. 옥경의 신선 벗이 나를 지성스레 생각해 주어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나누어 보내주었구려” 이 시에서 불볕더위가 쇠를 녹인다는 말은 한여름 더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1940년에 펴낸 옥담 김위원(玉淡 金偉洹, 1864-1925)의 시문집 《옥담고(玉淡稿)》에 나오는 한시 ‘부채선물에 화답’입니다. 조선시대 옷을 훌훌 벗어 던질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소나무 그늘이 진 정자에서 솔바람 맞으며 시를 읊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기도 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해가 한낮이 되려는데 빛이 갑자기 엷어져 / 처음에는 담장 밖에서 징소리 들리더니 / 잇달아 쿵쿵 북소리 사방으로 퍼지네 / 깜짝 놀라 문밖에 나가 해를 쳐다보니 / 어슴푸레 해 주변에 물체가 있는 듯 / 아이 불러 물동이에다 맑은 물 담게 하고 / 그 물동이 바닥으로 해를 살펴보니 / 해가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아 / 참담한 하늘 모습에 깊은 시름에 잠겼네” 위 글은 고려말의 문신 정추(鄭樞)가 쓴 《원재고圓齋槀)》에 나오는 시로 일식에 대해 읊은 것입니다.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는 해가림도 변고라 했고, 과학기구가 없던 때라 물동이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에 비치는 해를 관찰했습니다. 해가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았다는 것을 보아 부분일식이었던 듯합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식을 음기가 성하여 일어나는 이변이라 생각하여 양에 속하는 악기인 징과 북을 쳐서 일식을 없애려 했습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있으면 구식례를 했습니다. ‘구식례(救食禮)’는 일식이나 월식(月蝕)이 있을 때 이를 괴이한 변고라 하여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월대(月臺) 곧 섬돌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79년 전 오늘(7월 19일)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했습니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광복 뒤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분입니다. 선생은 1919년 도쿄를 방문해 일본 고위 관료들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당당히 연설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여 초기 혼란을 수습했던 분입니다. 그러던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떴습니다. 선생의 죽음은 온 겨레에게 큰 슬픔을 안겼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인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약 6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을 정도였습니다. “조국의 품에 안겨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 내가 그게 바라는 소원이었다.”라고 했다는 선생은 당시 김구와 이승만을 앞서는 대단한 겨레의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미군정 관리였던 리처드 로빈슨은 “미 국무부는 여운형을 당시 광복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