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경국대전》에 명시되었는데 회초리로 가볍게 때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중죄인에게는 능지처참(陵遲處斬, 대역죄를 지은 죄인을 머리, 몸뚱이, 팔, 다리를 토막 쳐서 죽이는 극형)까지 처했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형벌로 ‘팽형(烹刑)’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이는 탐관오리를 벌주는 것으로 곧 끓는 가마솥 속에 죄인을 넣어 삶는 공개처형을 말합니다. 팽형은 혜정교(지금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에 있었던 다리로 사람이 많이 건너다님) 한가운데 임시로 높다란 부뚜막을 만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큰 가마솥을 거는데 솥에는 물을 붓고 아궁이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장작을 넣습니다. 그 앞쪽에 천막을 치고, 포도대장이 앉으면 팽형이 시작되는데 진짜 삶는 건 아니고 죄인을 가마솥에 담고 솥뚜껑을 닫은 다음 구령에 따라 장작불을 지피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다음 솥 속에 든 죄인을 꺼낸 뒤 "살아있는 주검"을 식구들에게 넘기면 식구들은 미리 준비해 간 칠성판에 이 "살아있는 주검"을 뉘여 집으로 데리고 가서 격식대로 장례를 치릅니다. 이렇게 장례가 끝나면 호적이나 족보에 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興到卽運意(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뜻을 움직이고 意到卽寫之(의도즉사지) 뜻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간다 我是朝鮮人(아시조선인) 나는 조선 사람이니 甘作朝鮮詩(감작조선시) 조선시를 즐겨 쓰리 위는 다산 정약용이 쓴 “노인일쾌사 육수 효향산(老人一快事 六首 效香山)”의 한시 일부입니다. 다산이 노인의 한 가지 즐거운 일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거사(香山居士) 곧 백거이(白居易, 중국 당나라 때의 뛰어난 시인)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1832년 지은 것이지요. 이 시는 “조선시선언(朝鮮詩宣言)”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의 시를 중국 문학의 예속에서 풀어내려는 다산(茶山)의 강한 주체의식(主體意識)을 드러냈습니다. 《조선시대 한시읽기(한국학술정보)》에서 원주용 교수는 다산이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 “성인의 법은 중국이면서도 오랑캐의 짓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의 짓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하니,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화이(華夷)의 개념과는 달리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적 권위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는데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지요.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로 기부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나라 밖에서 무기를 사서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성 쌓는 곳에서 감독하고 일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사람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 먹은 사람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따로 한 처방을 연구해 내어 새로 약을 지어 내려보내니,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알 또는 반 알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 위는 《정조실록》 18년(1794) 6월 28일의 기록으로 정조 임금이 화성을 쌓는 공사장의 일꾼들이 더위에 지쳐 몸이 상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더위를 씻어준다는 ‘척서단(滌暑丹)’ 4천 정을 지어 내려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삼복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지난 지 이틀이 되었고, 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가 보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혹독한 불볕더위가 온 지구촌을 뒤흔들고, 밤에는 열대야로 잠 못 들게 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복지경(伏地境, 더위가 한창인 때)엔 자칫하면 열사병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가을이 시작된다는 24절기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이제 절기상으로는 가을철로 들어서는 때지만 아직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립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입하(立夏)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주었다.”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보면 입추까지 날씨가 무척 더웠고 더위를 얼음으로 겨우 버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고 하여 된더위에 고생한 것을 위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기사에는 “'입추' 무더위 여전‥. 주말, 남부 또 폭우 최대 120mm”라는 기사가 보입니다. 얼마 전에도 물폭탄으로 재산 피해는 물론 인명 피해까지 일어나 사람들은 불볕더위와 물폭탄으로 이중 고생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1769년) 7월 7일 기록에는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장마가 졌기 때문이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제(禜祭)’는 입추 뒤까지 장마가 계속되거나, 오랜 장마로 고통이 심한 때 날이 개기를 빌던 나라의 제사로 ‘기청제(祈晴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백행원(百行源)》을 몸소 지어 펴내도록 명하였다. 대개 사람의 자식으로서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갖추어 말한 것으로, 무릇 수천 자(字)가 되는데, 성스러운 마음으로 추모하여 지은 것이었다.” 이는 《영조실록》 106권, 영조 41년(1765년) 8월 6일 기록으로 조선후기 제21대 임금 영조가 백성들에게 효행을 권장하기 위하여 1765년에 쓴 책 《백행원을 펴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임금은 나이 72살 되던 해에 인간에게 있어서 효행은 온갖 행실의 뿌리임을 강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깨달아 실천에 옮기도록 권장한 글을 쓴 것이지요. 영조는 증자(曾子)의 《효경(孝經)》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 벗과의 질서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또 이 책은 한문본과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합본되어 있으며, 한자마다 음을 붙여놓았지요. 1책 21장의 얇은 책을 완성한 뒤 각 감영에 반포하였으며, 다시 각 감영에서는 이를 찍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문헌은 18세기 국어자료로서뿐만 아니라 영조가 무얼 바탕으로 백성을 대했는지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의(영창대군)가 강화에 이르자 가시나무로 둘러놓고 지켰는데, 삼엄한 감시가 임해(臨海) 때보다 배나 되었다.” 이는 《광해군일기》[정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2일 기록입니다. 1611년(광해군 3년) 영창대군에 봉해진 이의(李㼁),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대북 일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으로 자백하게 했고, 이에 영창대군은 폐서인(廢庶人)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 뒤 영창대군은 광해 6년(1614년) 3월 19일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영창대군이 죽은 까닭에 대한 문헌 자료는 두 가지로 나옵니다. 먼저 《광해군일기》 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10일 기록에는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펄펄 때서 죽였는데 방바닥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 죽었다."라고 나오며,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1625년) 3월 19일 기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독살하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서럽게 죽은 영창대군의 눈물은 비가 되어 음력 2월 9일 앞뒤로 내렸는데 이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잡절 삼복 가운데 중복(中伏)입니다. 여기서 복(伏)이란,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인테 복날에 유난히 공기가 가만히 정체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온통 폭염특보로 몸살을 앓습니다. 이런 날 우리 겨레는 삼계탕을 즐겨 먹었지요. 이때 삼계탕은 꼼짝하지 않고 있는 몸의 습을 불로 태워서 일부는 수분을 없애고, 일부는 순환시켜 주게 됩니다. 우리문화신문에 <한방으로 알아보는 건강상식>을 연재했던 유용우 한의사는 특히 닭고기만 먹으면 순환까지 이루어지지는 않는데, ‘인삼’이 있기 때문에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몸에 힘이 있는 사람들은 삼계탕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게 혈액순환이 되고 이때 똥오줌과 땀으로 나쁜 요소들을 방출하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부족한 사람이 삼계탕을 먹으면 오히려 몸이 더 늘어지기도 한다고 하지요. 이럴 때는 습을 기운으로 순환시켜야 하기에 ‘황기’가 필요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땀을 능동적으로 뿜어내는데, 힘이 없는 사람은 피부 표면이 땀을 능동적으로 배출하지 못하고, 삐질삐질 끈끈한 땀이 납니다. 이때 인삼 대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자녀의 저택이 제도에 벗어난 것을 살피게 하였는데, 덕흥군(德興君)의 집은 50칸이므로 법전에 많이 벗어나지 않았으나(가운데 줄임) 정신 옹주(靜愼翁主)의 집은 3칸, 숙정 옹주(淑靜翁主)의 집은 6칸이 제도에 벗어난다. 이것은 헐라. 적간(부정이 있는지 없는지 캐어 살핌)은 공조가 하였으나 허무는 일은 오부(五部)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되, 서부(西部)와 중부(中部)에 있는 저택은 반드시 2부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라.“ 위는 《중종실록》 87권, 중종 33년(1538년) 7월 29일 기록입니다. 중종 임금은 옹주(임금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딸)의 집이 법전에 규정된 것보다 3칸과 6칸을 크게 지었다면서 이를 헐라고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무장 전림(田霖, ?~1509)이 한성부판윤으로 있을 때 왕자 회산군의 집 짓는 곳을 지나가다가 짓는 집의 규모가 큰 것을 보고 공사감독을 불러 야단쳐 기둥을 자르고 칸수를 줄인 일명 ‘납작집’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조선시대는 5백 년이란 긴 세월을 한 왕조 아래에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긴 세월 폭군도 있었고, 세도정치도 적지 않았지만, 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어리는 겨레라. 그러하므로 말은 겨레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겨레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겨레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겨레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이는 평생 배달말(한국어)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말로써 오늘은 그 주시경 선생이 세상을 뜨신(1914년) 지 온열 하나 해(111돌)가 되는 날입니다. 선생은 국어학자로서 우리말의 정리와 보급에 크게 힘썼지요. 그의 연구는 말글생활을 바로잡고 교육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 그 필요성은 이미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입니다. 한글은 세종임금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렀는데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 암클, 아랫글이라 했으며, 한편에서는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