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체부가 “서울시에 국어기본법과 서울시 국어 사용 조례를 준수하라고 촉구”한 요구를 서울시가 거절했다. 지하철 역사 혁신 프로젝트로 5호선 여의나루역에 ‘러너 스테이션’, 7호선 먹골역 ‘스마트 무브 스테이션’ 등 영문자로 표기하기로 해 문제가 되고 있다. ‘공문서 작성 시에는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어문규범에 맞게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한 국어기본법 제14조 규정과 서울시 국어 사용 조례 제2장 ‘시장은 공문서 등에 어문규범에 맞는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을 사용하게 항라는 조항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정책을 펴는 것이다. 서울시는 이를,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 역사를 재미있는 상징물로 만들고 도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하지만, 이처럼 영어로 써놓으며 시민들의 반응은 생각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영어로 써야 유식한 듯 보인다는 주제성이 없는 생각을 오세훈 시장은 하는 모양이다. 더구나 이 낯선 이름은 실제 로마자로 표기되긴 하지만, 영어에도 없는 조어라고 한다. 펀 스테이션은 굳이 번역하자면 ‘재미있는 역’이 되겠고, 러너 스테이션은 이름 그대로 지하철역 내에 있는 러닝장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어이 옛날의 제도를 실행하려 한다면 고대의 법복으로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고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심의(深衣)’가 그것입니다. 심의라고 하는 것은 존비와 남녀, 문무와 길흉에는 관계없이 통용된 정식 복장인데 유생들로서 도안을 넣고 설명한 사람이 수백 명입니다. 그러나 옛날 제도에 근거하여 오늘날을 생각하고 절충하여 취사선택한다면 어찌 편리하게 적용하는 방도가 없겠습니까?” 위는 《고종실록》 25권, 고종 25년(1888년) 10월 28일 기록으로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 ‘심의(深衣)’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세포(白細布, 흰색의 삼베)로 만들며 깃ㆍ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襈)을 두릅니다. 대부분의 포(袍, 바지저고리 위에 입던 겉옷)와는 달리 의(衣, 저고리)와 상(裳, 치마)이 따로 마름질(재단) 되어 연결되며, 12폭의 치마가 몸을 휩싸 심원한 느낌을 주는데 심의라는 말도 이런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심의의 흰색과 가장자리의 검은색, 복건의 검은 색이 조화를 이루어 학자다운 고귀한 기품을 풍깁니다. 이러한 심의는 철릭(天翼,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의 하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시험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의당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인데도, 요즈음 서얼들이 많이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외간에서도 모두 알고 있어서 과거 발표를 취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으며, 무릅쓰고 시험에 참여한 자도 그것이 죄를 얻을 일임을 알고 있으니, 이것은 조정에 기강이 없음으로 하여 발생되는 것이고 보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외람된 사람을 만약 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적던 책)에서 이름만 지우는 것으로 그친다면, 반드시 스스로 징계하지 않을 것이니, 그 죄를 통렬하게 징계해야 마땅합니다.“ 이는 《중종실록》 70권, 중종 25년(1530년) 12월 9일 기록으로 서얼이 과거를 보는 행위를 개탄하여 그 죄를 징계하자고 하자고 한 신하가 아룁니다. 조선 중기 《홍길동전》의 지은이 교산(較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첩이 낳은 자식 곧 서얼이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나라, 율도국을 세우는 소설 《홍길동전》을 쓴 것이지요. 하지만, 신분제 덫의 고통을 받은 사람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의 경우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틀 전엔 수도권에 눈이 내려 길이 얼어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時維仲冬爲暢月)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大雪冬至是二節)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六候虎交角解)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不鳴蚓結)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乃挺出水泉動)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 ... 아래 줄임) ... 위 시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기록한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로 호랑이가 교미하고 사슴뿔이 빠진다고 합니다. 이때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대비해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을 챙겨 먹는 지혜도 돋보입니다. 특히 제철 음식으로 비타민C가 풍부해 감기 예방에 탁월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공명첩(空名帖)을 전라도에 팔아 진휼의 자본에 보태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관찰사(觀察使)의 청에 따른 것이다. 대개 공명첩은 60살 이하의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법례(法例)였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곡식은 귀하고 응모하는 자는 매우 적어서, 나이와 값을 감하여 50살 이상으로 한정하고, 쌀 여섯 섬[石]을 바치는 자에게 팔도록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1682년) 12월 4일 기록으로 전라도에 공명첩을 팔아서 먹을 것이 없어 곤궁한 백성들을 도와주는 데 보태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공명첩(空名帖)이란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으로 관아에서 부유층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이름은 쓰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명첩을 받고 임명된 사람은 실제 일은 하지 않고 허울만 행세했습니다. 여기 공명첩을 보면 문서를 발급한 때는 대한제국 때인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로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지요. 날짜가 없다는 것으로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 곧 공명첩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은 올해 농정(農政)과 가장 큰 관계가 있는 일이다. 평년에는 혹 임시로 장패(藏牌)*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는 풍년이 들어 흥청거리는 정사이지 결코 흉년에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의정부에서는 앞서 미리 각 행정구역에 알려 전보다 갑절 엄히 단속하게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도 미리 단속함과 아울러 도성의 안팎에 거듭 분명히 알아듣게 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좌ㆍ우 포도대장도 한결같이 두루 알도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2월 1일 기록으로 흉년을 맞아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을 온 나라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는 조선시대 농경 사회에서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등 농사의 핵심 일꾼으로 여기는데 흉년에는 곡식 생산이 더욱 어려워지므로, 소를 보호해 농업 기반을 지키는 것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근본으로 알았던 사회(조선시대) 전체의 생존에 직결되었지요. 또한 이 ‘우금’은 소 돌림병이 생겼을 때도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도살한 사람을 유배 보내는 등 엄히 다스렸어도 소고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1452년) 11월 28일 기록에 보면 “춘추관에서 《고려사》를 인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란 내용이 보입니다. 《고려사》는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ㆍ정인지ㆍ이선제 등이 세종의 명으로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문종 원년에 펴낸 기전체의 역사서지요. 여기서 기전체란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태조에서 공양왕까지 32명 임금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에서 형법지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모두 139권 75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사》를 펴낸 목적은 조선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고려 말기의 부패와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반영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 서술 태도는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그 편찬 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으며,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했는데 인물 평가에도 객관적인 서술로 고쳐서 썼으며,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자료가 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900m쯤 가면 서울역사박물관을 막 지나 오른쪽에 한자로 ‘興化門(흥화문)’이라고 쓰인 경희궁의 문이 보입니다. 광해군은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東闕)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西闕)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그 넓이가 자그마치 7만 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경성중학교까지 들어서게 됩니다. 심지어 광복 뒤에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제급은 금표가 있는 땅에 장사를 지낸 죄가 있고, 백윤진은 점지(點指)해 준 죄가 있다.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고도 그 땅에 장사 지낸 것은 죽을죄고,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면서도 장사를 지내라 한 것도 죽을죄다. 똑같은 죽을죄로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나라에 법이 있는 바에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 다만 (가운데 줄임) 그 할아비의 공은 나라에서 잊지 못할 바가 있으니, 특별히 대대로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한 가닥 목숨만은 붙여주어 사형에서 감하고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에 유배토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1월 24일 기록으로 나라가 소나무를 기르기에 금표를 세운 산에 몰래 장사를 지낸 사람을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토록 한다는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음은 물론 소나무는 임금의 관을 짜는 데도 쓰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인 배 만들 때도 쓴 귀한 나무였습니다. 특히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고 으뜸으로 쳤습니다. 또 나라에서는 '황장금표(黃腸禁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22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인 소설입니다. 절기 이름이 작은 눈이 내린다는 뜻으로 소설(小雪)인데 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 채비를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추므로 작은 봄 곧 소춘(小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때는 평균 기온이 5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첫 추위가 옵니다. 그래서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전할 정도지요. 그런가 하면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으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소설 전에 김장하기 위해 서두르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일들에 분주합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고,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며,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지요. 참고로 같은 동아시아권인 중국과 일본의 소설 풍습 가운데 재미난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영양 보충과 체온을 높이기 위해 만두, 고기 등을 먹습니다. “겨울엔 따뜻한 음식으로 기를 보한다(补冬)”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츠케모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