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와 부여군은 지난 10월 1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부소산성에 대한 17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추가 성과를 공개했습니다. 17차 발굴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부소산성 내 가장 높고 넓은 평탄한 터를 조사하여 백제 왕궁의 높은 위계 공간임을 알 수 있는 대지조성과 굴립주 건물터 곧 땅속에 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넣어 만든 건물로, 지표면 위에 생활면을 설치한 건물과 와적기단 건물터를 발견한 바 있습니다. 특히 이 발굴조사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얼음을 넣어 두는 빙고(氷庫)가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부소산성에서 처음 발견된 사례입니다. 빙고는 17차 조사구역 동쪽 끝부분에 있는데 평면은 네모 모양이며 내부 단면은 U자형이고, 규모는 동서 길이 약 7m, 남북 너비 약 8m, 깊이는 2.5m지요. 바닥 가운데에 길이 230cm, 너비 130cm, 깊이 50cm로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뒤 남쪽에 깬돌을 채운 시설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빙고 안에서 생긴 물을 빼내기 위한 물 저장고(집수정)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빙고는 얼음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특수시설로 강력한 왕권과 국가 권력이 있어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에는 한자말 ‘가치(價値)’ 대신 우리말 ‘값어치’란 말을 씁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가치’와 ‘값어치’는 같은 말이 아니라면서 바꿔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관해 진주에서 ‘토박이말바라기’ 상임이사(맡음빛)를 하고 있는 이창수 님께서는 오히려 ‘값’이나 ‘값어치’가 ‘가치를 껴안는 폭 넓은 말이라며 ‘값’이나 ‘값어치’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우리문화신문에 글을 올렸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값어치’를 “일정한 값에 해당하는 분량이나 가치”라고 풀이했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일정한 값에 해당하는 쓸모나 가치”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또 우리 말꽃지음몬(문학작품)에도 이 말을 부려 써서 사람의 소중함과 삶의 무게를 멋지게 나타냈는데 예를 들면 안정효 님의 《하얀 전쟁》에서는 “죽음의 값어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무게로 측정된다.”라고 표현했다면서 꼭 ‘가치’란 말을 쓸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값어치’의 뜻풀이 속에는 ‘가치’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건값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성과 쓸모까지 아우르는 큰 그릇이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얼 24일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扶餘 無量寺 彌勒佛 掛佛圖)」는 국보 지정을 받았습니다. 1997년 7점의 괘불이 동시에 국보로 지정된 이후 약 30년 만에 새롭게 나온 국보 괘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 괘불도는 길이가 약 14m에 달하는 초대형 규모로,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를 아름답게 장식한 모습의 보살형 입상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장엄신(莊嚴身, 괘불에서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를 아름답게 꾸민 부처님) 괘불의 시작점을 연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지요. 초대형 작품임에도 균형 잡힌 자세와 비례, 적ㆍ녹의 강렬한 색채 대비, 밝고 온화한 중간 색조의 조화로운 사용으로 종교화의 숭고함과 장엄함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였습니다. 화기를 통해 법경(法冏), 혜윤(慧允), 인학(仁學), 희상(熙尙) 등의 제작 화승과 1627년(조선 인조 5년)이라는 제작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데, 기존에 국보로 지정된 다른 괘불도들보다도 제작 연대가 앞섭니다. 또한, 화기에 ‘미륵(彌勒)’이라는 주존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일찍이 충청 지역에서 유행한 미륵대불 신앙의 전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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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반보기 - 이명수 손님이 멀리서 찾아오면 중간쯤 나가 마중한다 제주공항에서 수월헌(水月軒)의 중간은 애월(涯月), 자구내 포구에서 한림, 월령코지, 명월 지나 애월 곽지모물까지 낮달과 함께 네 개의 바다를 건너간다 한가위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역시 우리 겨레의 큰 명절답게 이때 즐겼던 시절놀이(세시풍속)은 참으로 많지요. 우선 손에 손을 잡고 둥근 달 아래에서 밤을 새워 돌고 도는 한가위 놀이의 대표 '강강술래'가 있습니다. 또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이 원님을 뽑아서 백성이 낸 송사를 판결하는 놀이 '원놀이', 잘 익은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묶어 기둥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고, 다음 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비손하는 풍습 올게심니(올벼심리)', 채 익지 않은 곡식을 베어 철 따라 새로 난 과실이나 농산물을 먼저 신위(神位)에 올리는 ‘풋바심’,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고랑을 기는 풍속 '밭고랑 기기' 같은 것들이 있지요. 그런가 하면 '반보기‘ 곧 중로상봉(中路相逢)도 있는데 한가위가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의 큰 명절 ‘한가위’가 눈앞으로 곳곳에서는 벌써 명절 잔치가 시작된 듯하고 각 기업체는 명절맞이 선물 광고에 한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는 ‘한가위’라 쓰고 누구는 ‘추석’이라고 씁니다. 심지어 추석은 ‘秋夕’이라고 한자로 써 놓기도 하여 혼란스럽습니다. 여기서 ‘추석’과 ‘한가위’의 말밑(어원)을 살펴봅니다. 먼저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하는데 여기서 “추석월”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우리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입니다.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이지요. “한가위”는 ‘크다’라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음력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에서 유래한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분명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 한양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기록도 있어 이처럼 우리 겨레는 오랫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화(歲畫)는 비록 선왕 때의 관례이기는 하나, 60장을 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바야흐로 경비를 줄이고 있는 때에 종이와 채색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사람이 20장씩 받아서 석 달을 그린다니, 그들이 세화를 그려 바치는 비용이 이루 다 계산할 수 없습니다. 영구히 혁파하지는 못할지라도 선왕 때의 전례에 따라 그림의 장수를 줄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위는 《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1510년) 9월 29일 기록으로 화원이 각자 20장씩 받아서 석 달을 그리므로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사헌부 벼슬아치들이 지적하자 이에 중종이 "세화(歲畫)는 관례의 행사이므로, 내가 처음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마땅히 선왕 때의 관례에 따르겠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중종이 벼슬아치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훌륭합니다. 세화(歲畫)란 새해를 맞아 미리 화원에게 각기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미리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벽사적(辟邪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성격을 띠는 그림을 그리게 하는데, 그 그림 가운데 골라서 임금께 바치고, 나머지는 벼슬아치들에게 하사합니다. 세화 가운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1419년) 9월 23일 기록에는 “상왕이 승문고(升聞鼓)를 수강궁(壽康宮)에다 설치하여, 군사들의 억울한 실정을 풀게 하여 주라고 명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승문고(升聞鼓)’는 태종 때 처음 설치할 때는 등문고(登聞鼓)라고 불렀지만, 뒤에 ‘신문고(申聞鼓)’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조선시대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 원통함을 소송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대궐에 북을 달아 소원을 알리게 하던 것입니다. 신문고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누구나 거주하는 곳의 관청에 그 원통함을 고하고, 그 관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고, 접수된 원울한 사안은 사헌부가 규명하게 한 뒤에 정당한 것은 판결해 억울함을 펴게 하고, 사사로운 원한과 무고로 인한 것은 북을 친 사람을 처벌하게 하였습니다. 신문고는 조선의 통치자인 임금과 벼슬아치가 그들을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를 유지하고, 동시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사정을 알게 하고 억울한 일을 펴게 함으로써 선정을 도모하겠다는 뜻에서 비롯된 청원ㆍ상소ㆍ고발 시설로서 제도화되었으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1399년) 3월 1일 기록에는 중추원 부사 고 구성우의 부인 유 씨와 중 신생이 사통하고 구성우의 종 둘을 살해한 것이 들켜 이들을 잡아 국문하고 죄를 물어 죽이자고 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범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봄ㆍ여름은 만물이 생장하는 때라, 옛 법에도 죽이는 것을 꺼렸으니, 추분(秋分) 뒤를 기다려서 단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 열여섯째 추분(秋分)입니다. 조선시대는 위 정종실록의 예처럼 범죄자를 죽이는 일도 추분 뒤로 미룰 정도로 추분에는 모든 것을 삼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추분 무렵이 되면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벼에서는 향[香]이 우러나고 사람에게서도 내공의 향기가 피어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철종실록》 10년(185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보인 동시에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 제1대 임금 태조로부터 제25대 임금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동안의 역사를 888권에 담은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강제로 조선을 병합한 뒤 일본의 감독하에 편찬되어 일본인들의 왜곡된 기록이 들어있어서 《조선왕조실록》에 공식적으로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을 낱낱이 기록한 실록의 기초 자료를 쓰는 이들은 ‘사관(史官)’이었고, 임금은 사관이 없으면 원칙적으로 어떤 신하도 만날 수 없었지요. 이런 사관의 역할이 워낙 중요했기에 과거 시험 합격자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을 골라 사관으로 삼았습니다. 사관은 춘추관((春秋館))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었고, 보통 두 명이었는데, 임금과 신하가 하는 말을 빠른 속도로 한문으로 번역하여 적어야 했기에 빠른 이해력과 필기 실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사관이 임금의 곁에서 날마다 기록한 일기를 ‘시정기(時政記)’라고 하는데, 시정기는 매달 책으로 묶어서 춘추관에 보관하고, 시정기에 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