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북에서의 소월에 대한 평가 북에서 소월은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되었으나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 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 1956년) 그리고 김정은 시절 복권되었다. 그런 사실을 검색하면서 나는 한국의 인문학자 문학자들에게 절망한다. 그들에게 인문학은 있을지 몰라도 인문과학이 없기 때문이다. 세기적 천재 시인 소월의 사인에 대하여 작가적 상상력이 도를 지나치고 분단을 띄어 넘은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다만 이런 단편적 정보를 짜깁기 하면서 안 사실은 소월시인은 북에서도 존경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안중근 이후 동시에 존경 받는 인사는 내가 찾은 두 번째 인사이다. 《진달래꽃》초판본 등록문화재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시집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발간한 초간본으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같은 토속적인 정서를 잘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127작품이 수록돼 있다
[우리문화신문=진용옥 교수]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은 일제항쟁기를 처절하게 살았던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는 소월이며,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 민족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이요, 저항 시인이었다. 저서는 시집 진달래꽃이 유일하다. 이 시집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은 아사돌곳[한반도] 최고의 명승지요, 그곳에 핀 진달래는 전국 최고의 진달래일 것이다. 또 시어에 나오는 진달래는 님일 수도 있지만 조국임이 분명하다. 마치 만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이듯이. 이는 이흥렬의 가곡 바우고개에서도 10여 년 동안 머슴살이에 왜 하필 진달래를 안고서 눈물짓겠는가? 시인의 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며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 1902년 8월 6일) 태어났다. 바다가 있는 영주군 곽산면 남단동에서 자랐으며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혔다. 영변의 약산은 인근 고을 명산이다. ▲ 청북[청천강 이북] 지역지도 일본말을 쓰지 않고 늘 한복을 입었던 소월 그는 민족의식이 강했던 오산학교를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정공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20)선생은 영남과 기호의 양 학파에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서북지역 평안도 희천에서 환원당 문경공에 수학했고, 희천의 상현서원, 양현사에 제향 되었다. 근세의 안중근 의사와 함께 통일 한국의 대표적 인물이 될 수 있는 인연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정암 선생에 대한 북부 지역과 북인들 관심에 대하여 역사자료에 의하여 살피고 원격 위성 탐사, 현지방문 자료를 통하여 통일 시대의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추론한다. 여기에 나오는 용어는 가능한 한 분단 이전의 용어를 사용한다. 예하면 남인과 북인은 조선시대의 정파 명칭이 아니라 각각 남한[남부한국]과 북선[북조선]의 주민을 지칭한다. 정암 선생과 서북지역의 인연 정암 선생은 개국 공신 조온의 5대 손으로 본시 훈척 계열이었지만, 문경공 김굉필에게 수학하면서 사림[士林]의 영수가 될 수 있었다. 김굉필은 유배 중이었음에도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 학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대중화 위훈삭제 소격서 혁파 전제 개혁 등 요즘 말로 경제 민주화를 시도했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구현하려다 전라도 화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평양종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다. 원래는 대동문 루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1714년에 평양성 북성을 고쳐쌓으면서 북장대로 옮겨갔다가 거기서 화재가 일어나 깨지고 1726년 약 4달 동안 청동을 녹여 부어 다시 만든 것이 지금 있는 평양종이다. 종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3.1m, 무게 13.5톤이며 종의 겉면에는 중앙부에 세 줄의 띠가 들러 있고, 이를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가 각각 2등분 그리고 천판을 합하여 5등분 되어있다. 맨 위의 고리부분을 용트림으로 새기고, 상단에는 관음보살상, 하단에는 8괘와 능형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종에는 여러가지 무늬와 종의 내력에 대하여 쓴 글 등이 새겨져있다 균형 잡힌 형태, 종머리에 틀어 올린 용틀임 조각은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다. 보통 때에는 밤 10시와 새벽 4시에 쳤다고 한다. 종이 밤 10시에 28번 울리면(이것을 인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성 내성 4개의 큰 문이 동시에 닫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새벽 4시에 33번 울리면(이것을 파루라고 하였다.) 성문이 열려 사람들이 통행하였다. 1890년대까지는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줄 때도 쳤다. 보물1호에서 국보유적 제23호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평양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명칭도 달라졌다. 왕검성(王儉城)기성(箕城),낙랑, 서경, 호경(鎬京) 유경(柳京) 등이다. 단군이 이곳에 도읍을 옮겨 정하고, BC 813년에는 기자(箕子)가 후조선의 도읍으로 삼았고 BC 194년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계승되었다. 한때 낙랑군의 중심지였지만 고구려의 영향권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427년(장수왕 15)에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의 평양 동북의 안학궁(安鶴宮)이 중심에 자리 잡은 이후 522년(양원왕 8)에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586년(평원왕 28)왕궁을 이곳으로 옮겨, 전후 240년 동안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군사의 중심지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고 결국은 실패하게 되자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혔다. 조선시대에는 평양부에 관찰사를 두었지만, 1896년 8도에서 13도(道)로 분할하게 됨에 따라 평안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며, 광복이후 현재까지 조선인공의 수도이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평양이 한반도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내친김에 역사적 정통성에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2004년 6월15일 평양에서는 남북 공동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꽃으론 본 내나라라는 주제로 남 북녘 작가 40여명이 평양문화상품전시관에다 200여점을 올린 것이다. 8년 전 렌즈로 본 조국 그리고 2001년 백두에서 한라까지전 이후 세 번째로, 6 15 공동선언 4주년에 맞추어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동신문은 6월 15일자 4,5면에 이례적인 기사를 실었다. ▲ 안승일 작 백두산 2014년 전시회 출품작 그는 2002년 '렌즈로 본 조국'에서 북의 작가와 함께 별도의 코너에 백두산 사진을 전시했다. 불멸의 꽃 김정일 화, 김일성 화, 우리(조선인공)의 국화인 목란꽃, 백두산의 만병초, 묘향산 불영대의 두봉화, 금산산 도라지꽃과 해금강의 나리꽃, 명사십리 해당화와 백두대지에도 한나(한라)에도 붉게붉게 피어나는 진달래. (중략). 사진동맹 최경국 위원장은 우리민족은 남달리 꽃을 사랑하고 꽃놀이를 흥취 나게 벌여온다.고 강조하고 통일의 대화원을 가꾸는 좋은 계기가 되려는 것을 확신한다. 고 말했다. 이어서 류경선 남측 단장은 가장 큰 통일의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묘향산 만폭동을 올랐을 때 남녘 최고의 사진작가 한 사람이 외설 춘향가를 불렀다. 각설이 타령에 리듬 맞혀 부른 가사는 신록의 묘향산을 온통 홍등으로 물들일 수준이었지만 돼지 멱따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예로부터 춘향의 사랑이야기는 한국인에게 영원한 스테디셀러다. 왜냐하면 의열과 로맨스를 함께 갖추고 있으며 신분초월이라는 서민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조시대 평양은 색향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강계 미인으로 상징되는 남남북녀의 미색에다가 평양기녀의 자유 분망함을 은밀히 빗대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평양기녀들을 단순한 기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당대의 여류 문학가요 여류 예술가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속내가 있었으니 그것은 민중의 애환을 대변하는 해결사 들이었다. 왕조시대 벼슬아치들은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 이라는 속담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에 맞설만한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안이 바로 베갯머리송사였다. 이 말은 은밀히 밀실에서 해결한다는 것인데, 기녀들이 바로 백성의 대행자였다. 이른바 색주 해결법을 구사했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북녘의 국호는 조선 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줄이면 조선인공이고 보통 공화국이라 부른다. 남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에 선언했지만 국호는 대한민국 이지 공화국이라는 정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줄여 쓰면 한국 또는 대한이다. 따라서 공화국은 북녘을 지칭하지만 남녘 사람 대부분은 이런 호칭에 익숙하지 않고 그냥 북한이라 부른다. 북에서는 남조선이라 부른다. 이 두 명칭은 상대를 자기 강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간 유쾌한 명칭은 아닐 것 같다. 조선인공은 통일 국호를 고려연방공화국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반면 남녘은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막연한 철학만 제시하는 수준이고 남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연합국가 느슨한 연방으로 제시하거나 2025년 한반도는 통일 또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가 발표한 '2025년 세계적 추세' 보고서에서 2025년 한반도가 어떤 형태로든 통일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보고서는 만약 단일 국가로 통일되지 않는다면 느슨한 형태의 연방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조선일보 2008/11/22) 그렇지만 통일 국호를 제시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교수] 평양은 고려시대 서경(西京)으로 불리고 북방의 요처로서 중시되었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재성(在城)이 축조되어 중성을 형성하고, 938년(태조 21)에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어 외성이 되었다. 성종 때는 대동문(내성 동문) 경창문(景昌門=서문)칠성문(내성 북문)정양문(正陽門=내성남문) 함구문(含毬門=외 성 남문) 보통문(외성북문) 등 6대문을 건설하였다. ▲ 평양성 지도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정동향보다는 동남동쪽으로 비켜있는데, 이는 대동간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기 위한 풍수적 배려이며 이것이 곧 한국의 자생적 풍수사상이라는 지적이다.(최창조) 조선 태종 때 창건하여 선조 때 개축한 것이며 조선인공의 국보유물 4호이다. (1호는 평양성), 조선 전기 건축의 특성을 잘 드러낸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층 누각에는 읍호루(挹灝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질펀한 물을 손으로 퍼 올린다는 자못 시적인 표현이다. 인조13년 1635년 관찰사 안윤덕이 지은 현판이다. 칠성문은 내성 북문(서울의 자하문 격)으로 성 안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만들어졌
[그린경제/얼레빗 = 진용옥 교수] 한국어정보학회 회장,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고, 현 한국방송통신학회장인 진용옥 교수. 그는 오랫동안 한국어정보학회 일로 중국과 북녘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다. 그가 남북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전에 써두었던 북녘 땅 7박 8일 체류기(2004.6.11 ~ 6.19)를 연재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융합시킨 최고의 학자 진용옥 교수는 어떤 눈으로 북녘을 바라보았을까? (편집자말) 차례 0001. 인천과 북경공항에서 / 0002. 순안비행장에서 들어오는 길 / 0003. 평양성의 대동문과 보통문 / 0004. 모란봉과 을밀대 / 0005. 부벽루와 연광정 / 0006. 하중섬과 건널다리 / 0007. 대동강과 보통강 / 0008. 조선인공과 통일국호 / 0009. 평양 의열사와 색향의 기녀문학 / 0010. 꽃으로 본 내 나라에는 무슨 꽃이 찍혔는가? / 0011. 도읍풍수와 통일수도 / 0012. 평양종과 에밀레종 / 0013. 셔만호와 푸에블로호 사건 / 0015. 남포의 갑문과 고난의 행군 길 / 0016. 북녘의 구호와 남녘의 펜스광고 /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