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공항에 자전거 짐을 맡기고 숙소로 가다 이곳서 공항까지는 약 20킬로미터도 채 안 되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에 지고 공항에 도착하니 5시이다. 오늘의 주행은 130킬로미터나 되었다. 맡겼던 짐을 찾아 자전거를 포장한 후 다시 네 대의 자전거를 싼 짐을 보관소에 맡겼다. 공항에서 바로 모노레일을 타고 숙소가 있는 역까지 가는데 약 20분 걸렸다. 내일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와야 하므로 24시간 내 여러 번 탈 수 있는 승차권을 구입했다. 다음 날 8시에 숙소를 나와 모노레일을 타고 슈리성 공원에 갔다. 오키나와 전투로 모두 부서진 궁궐을 1992년에 복원하여 슈리성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류큐왕국의 문화유산은 1609년 사쓰마군에 의해 약탈되었고 또 푼돈에 팔려 본토로 반출되었다. 그러한 문서는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전투 후에는 미군들에 의해 대량으로 반출되기도 했다. 마치 일본에 합병된 조선의 모습이 생각나게 한다. 야만인이라며 오키나와인 한 쌍 전시, 1903년 오사카 박람회 인류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03년 오사카 박람회 인류관에 야만인이라며 오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헤노꼬를 지나 329번을 타고 난조시로 들어와 다시 331번을 타고 해안을 따라 이토만시로 향했다. 아침나절 간헐적으로 계속 내리던 비는 오후가 돼서 그쳤다. 길가 아주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했는데 평범한 음식이 우리 돈으로 만 원이 넘고 맥주도 5천 원이 넘는다. 확실히 오키나와의 물가는 우리나라보다는 비싸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연히 들린 한 카페에서 또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카페는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조그만 나무집이었다. 치즈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했는데 커피는 자신이 알아서 몇 번이고 가져다 마실 수 있었다. 가까운 곳 탁자 위에 뜨거운 커피, 냉커피, 얼음, 그리고 몇 개의 차가 준비되어 있어 알아서 가져가면 되었다. 잠시 후 치즈케이크가 하얀 접시에 아주 예쁘게 담겨 나왔다. 값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적절했다. 목마르던 차에 몇 잔이나 냉커피를 마셨는지 모르겠다. 일본은 왜 미국에 종속되기를 자처할까? 우리나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고 기득권 세력이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의 후손이니 기득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스스로 종속적인 나라가 되려고 한다고 억지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일본은 스스로 굴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같은 연합국인 소련의 남하에 대항해 일본을 친미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의 천황제는 이용가치가 매우 크다고 봤다. 그래서 히틀러 못지않은 A급 전범인 히로히또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상징적인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켰다. 히로히또는 맥아더에게 미군의 일본 장기 주둔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그때만 해도 국민당 정부인 중국이 친미국가이기에 미국의 세계전략으로 볼 때 일본을 비무장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에 상징적인 천황제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을 만들게 했다. 일본은 헌법상 평화국가였지만 오키나와는 예외였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전략상 공격기지와 후방지원기지로 일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오키나와를 세계전략에 있어 중요한 군사요충지로 생각했다. 그래서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독립시켰지만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일본에 반환할 때까지 군사식민지로 삼았고 이후에도 미군은 항구적으로 일본에 주둔을 하고 있다. 마치 쿠바를 반식민지로 삼고 강제로 관타나모를 빼앗아 미군기지를 설치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는 것과 같다. 미군, 헤이그협약을 위반하며 토지 강제로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호텔의 아침식사는 6시 반부터였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식당에는 비수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럼에도 큰 소리 내는 사람들 없이 조용하게 다양한 뷔페식의 아침을 즐기고 있다. 작은 부주의가 펑크를 내다 8시에 출발했다. 자전거를 맡긴 곳에 표를 주니 자전거를 내준다. 날씨가 흐린 것이 꼭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 예정된 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나키진 성터(今歸仁城跡)다. 어제 타고 왔던 국도 58번을 타고 해안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차도로 달리다 인도로 올라서려 했다. 인도가 차도보다 약간 높아 가볍게 올라갈 수 있겠거니 하고 산악자전거 타던 습관으로 핸들바를 누르고 앞바퀴를 들었으나 넘어지고 말았다. ▲ 산악자전거 타던 버릇 탓에 펑크 나다. ▲ 거북이 모양을 한 섬이 눈앞에 있다. 아차! 내 자전거 앞바퀴에는 충격완화장치가 없지! 산악자전거는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앞바퀴가 받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 충격완화장치가 붙어있다. 그래서 핸들바를 양손으로 누르면 핸들바가 내려가고 다시 튀어나오는 그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오키나와전투 때 처음으로 미군이 상륙한 자탄초(北谷町)를 지났다. 이웃한 가데나초(嘉手納町)에 들어가니 미공군 기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 기지는 가데나의 83%나 차지하고 있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일 뿐 아니라 해외 미군기지 중에서도 가장 넓은 곳으로 가데나초을 비롯한 4개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미군기지가 80% 이상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잔인한 일본군의 상징 치비치리 가마 나하공항으로부터 35킬로미터쯤 가니 요미탄손이 나왔다. 나미히라(波平)의 치비치리가마를 지도에서 찾을 수 없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잘 알지 못 한다. 이렇게 유명한 곳을 왜 모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할머니 둘이 있어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설명을 하는데 우리가 일본말을 못 하는 것을 알자 자신의 차를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왔던 길을 다시 내려 한참을 가서 동굴을 알려준다. ▲ 치비치리가마를 안내해준 주민들과 함께 이정표는 없었고 차도에서 한 2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계곡으로 나 있는 입구에서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2015년 12월 1일. 제주도 강정에는 기어이 해군기지가 만들어지고 해병대가 창설됐다. 전국의 많은 시민이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정부는 편법을 써가며 강압적으로 군사기지를 만들어 천혜의 해안 절경이 사라졌다. 하지만 오키나와(沖繩) 나고시(名護市)의 헤노꼬 앞 바다는 강정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해안을 매립하는 미군기지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보다 밀어붙이기를 훨씬 더 잘하는가 보다.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섬으로써 공통적인 역사적 불행을 겪었다. 오랜 세월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일본에 점령당해 큰 고통을 겪었고 제주도는 삼별초와 원나라에 점령당해 심한 고통을 겪었다. 오키나와 주민은 오키나와전투 때 같은 나라인 일본군에게 살육을 당했고, 제주도 주민은 해방 후에 4・3사건으로 같은 민족인 한국군에게 살육 당했다. 그것을 기록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오키나와에는 평화기념공원이 건립되었고 제주도에는 4・3 기념관이 생겼다. ▲ 자전거 평화기행을 한 오키나와 지도 군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어 두 섬은 평화를 지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세종 1년, 이 해는 크고 작은 일들이 연속으로 닥칩니다. 그때마다 세종은 어정쩡한 포즈를 취합니다만 특유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상왕인 태종 밑에서 일을 배워 나갑니다. 하나하나가 공부인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따뜻하고 바른 정치를 폅니다. 흉년이 들어 일종의 암행어사격인 감찰을 보낸 뒤 보고를 받는데, 백성들이 사정이 어려우니 세금을 면제해달라는 요청이 대부분입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세종은 이들을 타이르면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안 해주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세종실록 1년 1월6일) 어진 임금으로서 세종의 모습, 1년째 접어든 초보 임금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세종의 건강이 그것입니다. 세종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비중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태종은 젊은 임금에게 행동을 절제하기를 권하며, 동시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문(文)과 무(武)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세종과 사냥에 나서겠다고 발표합니다. 자상하면서 지혜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문과 무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 없다.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 김기섭 기자]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두 달이 못 되었을 때입니다. 신하들은 경연 자리에서 젊은 임금에게 충고합니다. 경연은 신하들이 유교 경전과 역사를 왕에게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소위 제왕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날도 신하들은 왕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면서, 공부를 하여 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면 신하들이,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탭니다. 공부도 공부 나름이라며, 마음공부(心上功夫)야말로 참 공부라고 말이죠.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안 된다.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유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태종 18년,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전격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습니다. 어렵고 힘든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이 세자가 된 충녕대군에게 쏟는 아버지 태종의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책봉한다는 책문에서 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그 말은 지극히 소박합니다만 많은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어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중하고 부지런히 하라는 그것입니다. 너 충녕대군 도(祹,세종의 이름)는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크다는 점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해야 한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