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단지 하늘만이 조화(造化)를 만들고 선악(善惡)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덕(德)을 주셨다면, 마땅히 수명(壽命)도 주셔야 하거늘 덕(德)과 수(壽)가 일치하지 않고, 그 이치 또한 알기가 어렵네. 조선 개국(開國) 이후에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계승하여 왔고 훌륭한 왕족은 많았다. 그러나 월산대군처럼 재주와 덕을 겸비하였더란 말인가? 진실로 대군이었다. 몸가짐이 성결하였다. 근면 검소하였으며, 경적(經籍)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고, 문장(文章))을 지으면、옥을 꿰고 구슬을 이은 듯 솜씨가 대단했다. ▲ 고양시 신원동의 아담한 사당 이는 월산대군 신도비에 있는 글의 일부이다. 월산대군 이정(李婷1454~1488)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친형으로 두 분의 우애는 남달리 돈독했다고 전해진다. 성종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인 1467년에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종 나이 13살 때 일이다. 나이도 어리고 장자도 아닌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실세인 한명회 때문이다. ▲ 월산대군 사당 표지석 흔히 왕이 되지 못한 형제들은 역적이 될 가능성이 많아 죽임을 당하곤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아버지에게 밥사발을 던지면 죄가 될까, 안 될까? 조선 중종 임금 때 아버지께 밥사발을 던진 백성이 있었다. 중종 13년인 1518년 사재 김정국이 황해감사로 나갔을 때 아비에게 밥사발을 던진 아들이 관가에 잡혀 온 일이 있어 시끄러웠다. 황해감사이던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내가 황해감사로 가 있을 때 연안(延安)에 백성 이동(李同)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와 말다툼이 일었는데 그만 아비에게 밥사발을 던져버렸다. 이웃사람이 이를 보고 아들을 잡아서 내가 있는 감영(監營)으로 보내왔다. 그런데 이 자가 추국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죄를 자백한 것이다. 나는 죄수에게 너의 죄는 사형이 마땅하다. 너는 부자간이 하늘과 땅의 위치요 임금과 신하의 자리란 것을 모르느냐? 아비가 없으면 어찌 네 몸뚱이가 있겠느냐? 따라서 부모를 잘 모시면 효자가 되고 욕하거나 구타하면 악역이 되는 것이다. 너는 밥사발로 아비를 때렸으니 땅이 하늘을 범한 것이나 다름없고 신하가 임금을 범한 것과 같다. 법에 비추어 사형이 당연한 고로 내가 너를 사형에 처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죄인이 말했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청정 (加藤淸正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앞장선 가토기요마사를 말함)의 일에 대해 승지의 의견은 어떠한가? 선조의 질문에 홍이상이 답하길, 오랑캐들이란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당당하면 절대로 애걸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말한 것을 보면 너무나 흉악스럽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그들이 중국군과 서로 버티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무슨 조처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강화만은 반드시 이루어서는 안 됩니다. 대의(大義)로 말하면, 중국의 입장에서는 혹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나라로서는 만세토록 기필코 갚아야 할 원수들인데 어떻게 그들과 강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도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27년(1594) 4월 1일) ▲ 모당 홍이상 무덤 모당 홍이상(洪履祥,1549-1615)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신임이 컸던 인물로 고양 8현(8賢) 가운데 한 분이다. 고양시 성석동에는 선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서있는데 신도비에 비친 모당 선생의 인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났다. 자식의 분분을 지켜 하나같이 성인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우리나라 정기 시장인 5일장의 전신은 조선시대의 향시(鄕市)에서 비롯된다. 영조46년(1770)에 나온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당시 각 도읍별로 장의 이름과 장이 서는 날을기록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전국에 1,064곳에서 장이 선다고 했으며 고양시의 장은 38일에 서는 사포장, 16일로 열리는 사애장, 49일로 서는 신원리장이 있었다. 사포장은 지금의 대화초등학교 부근이고, 사애장은 행주외동의 행주나루변, 신원리장은 벽제역 인근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고양지역의 장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변모하는데 일제가 만든 《한국수산지 ,1908》에 보면 백석장(510)과 일산장(38)만이 고양지역의 시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1908년 경의선 개통으로 신원장은 사라지고 사포장이 일산역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일산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산장이 생긴 것은 1908년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개통과 관련이 깊다. 서울역을 출발하여 40분이면 신촌, 화전, 능곡, 백마를 거쳐 일산역에 다다르므로 서울의 물건들이 일산장으로 몰려들었다. 지금 일산장은 일산종합시장으로 상설시장화 되어 있지만 여전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전 도원수 권율(權慄)이 졸하였다. 율은 임진년 변란을 당하여 몸을 던져 싸움터에 달려가 전투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켰었다. 그 이치(梨峙)의 승리와 행주(幸州)의 대첩(大捷)은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33권》(1599) 7월 1일 치 기록으로 선조 때 권율 장군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이름이 나온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조선에 있어 위급한 전쟁이었고 그 한가운데 권율 (1537~1599)이 있었던 것이다. 행주대첩 하면 떠오르는 권율장군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왔다. ▲ 양주시 장흥 석현리에 있는 권율 무덤, 좌우로 부인과 함께 묻힌 권율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에 45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의 평균 수명과 보통 30살 전후에 문과에 급제하는 추세에 견주면 매우 늦은 출발이었다.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 정9품)로 관직을 시작해 전라도 도사(都事, 정5품)경성판관(종5품)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급제한 나이로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고양시 끝자락인 덕양구 동산동에서 구파발쪽으로 가다보면 고가도로 밑에 목이 잘린 커다라 돌부처가 세워져 있는데 이름하여 고양(高陽) 밥 할머니 석상이다. 이를 두고 고양의 잔다르크 동산동 밥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동산동 창릉모퉁이공원에 있는 밥 할머니 석상. 글쓴이가 찾아갔을 때는 작년 제향 때의 펼침막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밥 할머니 석상에 관한 유래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의 산천을 피로 물들인 지 8개월이 지난 선조 26년 정월의 일이다. 무방비 상태의 조정은 긴급히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명나라는 이여송을 대장으로 삼아 명군 4만 명을 파견했다. 명과 합세한 조선군은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향해 남진하였다. 그러나 그해 정월 26일 한양을 눈앞에 둔 고양시 벽제관의 남쪽 숫돌 고개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에게 참패하여 북한산으로 뿔뿔이 패주, 이여송과 장수들의 일부는 북한산 노적봉 밑에 집결하게 되었다. 왜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이여송과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진로를 구상 중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외척 중에 새로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붉은 대문이 궁궐을 둘러쌌네 노랫소리, 풍악소리에 놀음 잔치 일삼고 갖옷과 말은 가벼움과 살찜을 다투네 단지 영화로움과 욕됨을 따질 뿐이지 옳고 그름은 수고로이 묻지도 않네 어찌 알리오 쑥대 지붕아래서 추운 밤 쇠덕석 덮고 우는 백성을 ! (詠史, 권 3: 155)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글이다. 구중궁궐에서 호화호식 하면서 추운 밤 한뎃잠 자는 백성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석주 권필의 시는 매양 이렇다. 충주의 비석 돌 유리처럼 고우니 수천 명이 뜯어내고 수만 바리 실어내네 물어보자 그 돌 실어 어디로 옮겨가나 실려가서 세도가의 신도비 된다 하네 그런 집의 신도비는 어느 누가 지어내나 글씨체도 굳세고 문장력도 기이하지 한결같이 적는 내용 “이 어른 살았을 때 받은 자질 배운 학식 또래 중에 빼어났도다 임금을 섬김에는 충렬하고 강직했고 집안에 지낼 적엔 효순(孝順)하고 인자(仁慈)했다 <권필, 충주석(忠州石) 가운데 일부> ▲ 고양 행주산성 아래 역사공원(행주나루터) 안에 있는 권필 시비 ▲ 석주 권필의 생애를 적은 시비 뒷면 -해적이(연보) 이윤옥- 권필의 눈에는 천년만년 돌비석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신원(新院) 원주 되어 사립문 고쳐 닫고 유수청산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碧蹄)에 손이라 하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 신원(新院) : 현, 고양시 신원동을 말함 * 벽제(碧蹄) : 옛 고양군에 있던 벽제관역(驛) 고양시 신원동에는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국문학사에 빛나는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송강 정철(1536~1593)이 10년간 머물렀던 송강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그는 35살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어 38살에는 모친상으로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또한 나이 50살에는 정치 일선에서 떠나 4년간 이곳에서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그리고 강화 유배지에서 죽은 뒤에는 송강마을 뒷산에 부모님과 나란히 묻혔다. (사후 71년째에 충북 진천으로 이장) ▲ 송강마을 안쪽 송강문학관 앞에 세워진 안내문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위는 송강 정철의 훈민가(訓民歌)의 하나로 송강이 고양땅에 머물렀을 때 지은 시이다. 양친을 모두 이곳 고양땅에 묻은 송강은 시묘살이만도 6년을 했는데 그는 평소 술을 즐겨 마셨다. “재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비늘처럼 쌓인 보랏빛 돌들 / 서로 껴안고 / 즈믄 세월을 보냈다 / 쓸어내리려는 억센 물줄기 속 / 서로 보듬으며 / 닳아 문드러질지언정 흩어지지 않았다 / 용마 타고 다리 놓던 임 장군 떠난 지금 / 즈믄 해 흐르는 물살 위로 / 빠알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맴맴맴 이 시는 글쓴이가 지난해 충북 진천에 있는 농다리(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를 가보고 지은 진천 농다리이다. 다리는 흐르는 물위에 놓는다. 이쪽 뭍과 저쪽 뭍을 이어주는 다리에는 그래서 전설이 많고 예부터 이야기 거리가 풍부하다. 진천 농다리 뿐만 아니라 이리 오래된 다리는 전남 함평에도 고려시대 것으로 전해지는 고막천다리(보물 1372)가 있다. 고양시에도 이들 다리에 버금가는 다리가 있다. 바로 강매동석교(향토문화재 제 33호)이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창릉천 변에 고즈넉하게 놓인 이 다리는 한강에 놓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리에 견준다면 보잘것없지만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 더없이 소중한 마을의 공용재산이었다. ▲ 강매돌다리(석교)의 전체 모습 강매동석교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유래가 적힌 비석이 625 한국전쟁 때 사라져 고막천다리처럼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고려시대 왜구 퇴치의 최고 장수를 들라하면 누구든 최영장군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최영장군은 고려 충숙왕(1294-1339)이 집권하던 1316년에 사헌부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새기며 성장했다. 최영장군은 훗날 이성계에게 살해된 우왕(1365-1389)의 장인으로 우왕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면 무덤 안내 팻말이 있다 우왕 4년(1378)에 왜구가 착량(窄梁, 지금의 강화)에 모여 승천부(昇天府)를 침입하니 최영장군은 이성계와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서훈되었으며 우왕 6년에는 해도도통사를 겸하여 왜구방비에 힘썼다. 그러나 우왕은 가끔 엉뚱한 데가 있었다. 온나라에 왜구가 날뛰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놀러 다닐 생각을 했다. ▲ 무덤 입구 계단 오르기 전에 안내글 그러자 최영이 간하기를 요즘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는 형편이며 또 곧 농사철인데 분별없이 왕께서 유람을 즐겨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이 말하기를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