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아나바다 운동은 친환경적이기는 해도 친경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997년에 우리나라가 겪었던 외환위기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물건을 적게 소비하는 것이 미덕일지 몰라도 자본주의 경제 제도에서는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미덕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이 돈을 쓰지 않고, 곧 물건을 사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팔리지 않는 물건들은 창고에 쌓이고 공장은 생산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장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경기가 침체될 것이다. 환경을 보호하려다가 나라 경제를 망칠지도 모른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번 산 물건을 아껴 쓰고 오래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싱어(Singer)라는 이름의 재봉틀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해서 시사점을 준다.
독일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작 메릿 싱어는 1851년에 미국 뉴욕에 싱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재봉틀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싱어는 경영에도 일가견이 있었나 보다. 그는 미국의 모든 가정에 재봉틀 한 대씩 보급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할부판매 방식을 도입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77년에 일본에 여행 갔던 김용원이 사 온 것으로 알려졌다. 1896년에는 이화학당의 교과목에 ‘재봉과 자수’가 있었고, 1905년에는 미국의 싱어사가 한국에 지점을 설립하였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 섬유산업에서부터 출발한 산업화 과정에서 재봉틀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싱어 재봉틀은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져서 유명했다. 100년이 넘게 사용해도 싱어는 고장이 나지 않았다. 싱어는 톱니바퀴와 부품들을 전부 금속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정용 재봉틀은 작동 시간이 적은 만큼 쇳덩이 부품들이 좀처럼 마모되지 않았다. 서울의 을지로 재봉틀 거리에는 중고로 파는 싱어사의 초기 제품은 아직도 문제없이 잘 굴러간다고 한다. 싱어 재봉틀은 박경리 작가(1926~2008)가 생전에 무척 아끼던 물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물건이 고장 나지 않으면 소비자는 좋겠지만 생산자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싱어사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가? 싱어사는 재봉틀의 톱니바퀴를 적당히 망가질 수 있게 플라스틱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기업으로서는 어떤 상품의 내구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적당 기간 사용하다가 버리고 새 상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서 30년 동안 계속 타고 다닌다면 자동차 산업은 어떻게 될까?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 경제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디올 명품 가방을 하나 사서 낡아질 때까지 계속 들고 다니면, 디올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옷 한 벌을 사서 헤어질 때까지 계속 입는다면 의류산업은 어떻게 될까?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옷은 1년에 1,000억 벌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약 1/3인 330억 벌이 같은 해에 버려진다고 한다. 영국의 한 고급 의류 상표는 재고 상품이 헐값에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5년간 1억 달러어치의 옷을 소각했다고 한다. 그 회사의 경영진은 재고 명품을 싼값에 팔 바에는 그냥 불태워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패션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의류산업이 두 번째로 가장 환경오염이 심각한 산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의류 70만 톤이 버려지고 그중 2/3는 쓰레기로 매립된다고 한다.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2020년 “순환 경제를 위한 낭비 방지법‘을 제정하여 의류의 불태우거나 매립을 금지하고 있다. 이 법을 어기면 과징금을 내야 해서 판매되지 않은 의류는 기부하거나 개발도상국에 중고품으로 수출해야 한다.
비싼 옷을 불태우는 것은 유럽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의류 업계에서도 팔다가 남은 패션 의류는 보안폐기업체에 돈을 주고 넘긴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조건은 파쇄 또는 소각시키되 남몰래 없애 달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패션을 주도하는 옷의 희소성을 보장해서 높은 값을 유지하기 위함이 첫째 이유고, 재고 보관 비용보다 처리 비용이 더 싸다는 것이 둘째 이유다. 지구온난화를 염려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볼 때는 미친 짓이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 때에 시작된 ‘아나바다’ 운동은 불필요한 소비를 거부하는 사회운동이었다. 그러나 소비자 중심의 아나바다 운동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번성한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소비는 늘어나고 이산화탄소 역시 늘어난다.
선거에 출마하는 모든 정치인은 유권자들에게 ‘내가 당선되면 여러분의 소득을 높여서 더 잘 살게 해 주겠다’라는 공약을 내건다. ‘내가 당선되면 지구온난화를 막겠다’라고 공약하는 후보자는 아직 한 명도 못 보았다. 그런 공약을 내걸면 선거에서 이길 수가 없다. 미국의 대선 후보인 트럼프는 다시 당선되면 “(지구온난화를 규제하는) 파리협정에서 탈퇴하겠다”라고 공약하였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지구온난화는 ‘사기’라고 공언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아는 몇 사람의 경제학자와 통화를 해 보았다. 몇 사람의 환경학자와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UN에서 지구온난화의 해법으로 제시한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한 사람도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더욱 풍족하고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에게 환경친화적 생활(자원과 에너지를 적게 쓰는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필자 역시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에 공감한다.
지난 2023년은 산업화 이래 가장 더웠던 해로 기록되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더울 것으로 기상학자들은 전망한다. 지구온난화라는 환경위기에서 인류를 구하는 해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온갖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소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는 지속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경제발전과 행복과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5,000달러 이상이면 행복은 소득과 상관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21년에 35,373달러로서 사상 최고치를 달성하고 코로나 여파로 2022년에는 32,886달러로 약간 떨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주변 사람들(은퇴한 후 귀촌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돈이 아주 많은 부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적당한 소득에 만족하면서 여행과 취미 생활을 즐기고 남과 잘 어울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 같다. 개인 차원에서 돈(경제)과 행복은 정비례하지 않은 듯하다.
2008년 프랑스 파리에서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평등을 주제로 국제탈성장대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때 탈성장(脫成長, degrwoth)이라는 용어가 소개되었고 이후 탈성장에 관한 논의와 저술이 확산되었다.
일본 교토 대학의 금속공학 교수 출신인 쓰찌다 다까시는 《공생공빈》이라는 책(2007년에 번역 소개됨)에서 자원이 한정된 지구상에서 모두 함께 부자로 살자는 공생공영(共生共榮)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함께 가난하게 살자는 ‘공생공빈(共生共貧)’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 사회>라는 책(2014년에 번역 소개됨)을 통해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성장의 속도를 늦추고 ‘검소한 풍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탈성장 또는 공생공빈이 대량소비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퇴직 후 사학연금을 받으면서 시골의 작은 집과 작은 차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환경주의자로서 필자는 탈성장이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탈성장의 전도사가 될 자신은 없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에서 살며 초등학생인 두 자녀의 사교육비를 걱정하고 있는 아들 부부에게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탈성장이 필요하니 친환경적으로 살아라”라고 권할 수는 없다. 괜히 말을 꺼내다가는 핀잔을 들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앙 뉴스가 전해질 때마다 나는 후손에게 빚을 물려주는 것만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가 지구온난화를 막지 못하고 후손에게 떠맡기는 것만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