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지난 10월 13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바로 가야금의 명인 고 백인영 선생의 추모음악제였다. 이날 공연의 정점은 시나위 합주로 김청만(장구), 최경만(피리), 원장현(대금) 등 이 시대 최고의 명인들이 함께했다. 그런데 앞자리 가운데는 가야금 한 대와 방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바로 고 백인영 선생은 명인들이 연주를 멈추자 영상과 음악으로 환생한 것이다. 나는 강동했고, 가슴이 미어졌다. 특히 이승에 없는 백 명인과 대담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이를 안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교수는 내게 백 명인의 수제자 이민영을 소개했다. - 백인영 선생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권해서 백인영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제게 성금련류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그때 이미 선생님의 음악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제가 재수하는 1년 동안 늘 저를 데리고 공연에 가셨는데 이때 어린 제게 무대 경험을 쌓게 해주시려는 듯 본인은 아쟁을 잡으시고 제게 가야금을 연주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연습할 때 제 장단이 맞지 않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이번엔 전통춤을 추는 명인 후보를 소개한다. 한국무용의 정제된 멋과 함께 계곡 물 흐르듯 요동치는 춤사위로 한국무용의 참맛을 보여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준인간문화재) 정명숙 명인이 추천하는 박지혜 씨다. 박지혜 씨는 고등학교 때 이미 한양대 콩쿨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난해 임방울 국악제 최우수상(장관상)을 받아 차세대 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춤은 어떻게 추게 되었나요? 어머니께서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아마도 본인이 좋아하셨지만 외할머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딸인 제가 이루어주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께서 리틀앤젤스 비디오를 가져오셔서 보여주시고는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후 잘 한다고 어머니나 어른들이 칭찬해주시는 게 신나서 학원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날 춤 공부하러 갔을 정도로 우리춤을 좋아하셨습니다. - 정명숙 선성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영남대학교 국악과에 정재(궁중무용) 전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구시립국악단 공연에 선생님께서 특별출연하셨어요. 이때 저는 선생님의 춤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 장구를 치게 된 계기는? 제가 사는 경기도 광명시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보존회가 있습니다. 또 제가 다녔던 충현고등학교는 광명농악 전수지정학교였지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자연스럽게 장구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를 가르쳐 주신 광명농악 예능보유자 임웅수 선생님은 무척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다 처음 장구를 배울 때 선배들은 무섭고 장구는 잘 쳐지지 않고 손가락엔 피가 나고 해서 솔직히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애먼 장구와 많이 싸웠지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장구를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닐까? 남들도 하는데 나만 안 될 것 없잖아 하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진하고 아직 어리지만 조금 나이가 들고 보니 장구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구를 안했다면 무얼 했을까 생각할 때 지금의 제가 있게 해주신 선생님의 은혜가 정말 큽니다. 광명농악에는 김종미 씨 말고도 임웅수 선생의 여러 제자가 있을 것. 왜 종미 씨를 추천했는지가 궁금했다. 대담하다 말고 전화를 걸게 했다. 임웅수 스승에게 굳이 종미 씨를 추천한 까닭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피리명인 최경만 선생의 추천을 받았는데 어떤 인연인가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유지숙 선생님의 공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최경만 선생님이 오셨고, 선임병들의 도움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서울로 짐을 싸가지고 와 월세 14만 원 짜리 반지하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뒤 2년 동안 선생님께 개인지도를 받았는데 교습비를 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농사 지신 배, 쌀, 배즙 등을 보내주신 게 전부입니다. 나중에 선생님께 들었는데 차마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선생님은 마음이 여리고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크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만난 게 어쩌면 제 일생의 가장 큰 복일 것입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그것도 연주할 때 담아내는 감정까지도 세세히 가르쳐주셔서 제 피리는 모두 선생님으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 그럼 어떻게 피리를 만나게 되었나요? 제 고향이 밀양인데 어렸을 때부터 꽹과리를 치시는 아버님을 따라다니면서 징을 치고 아주머니들께 칭찬도 받고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게 어쩌면 피리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정가(가곡)를 선택하고 배우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정가(正歌)란 3가지 노래 곧, 가곡, 가사, 시조의 바른 노래를 일러 부르는 이름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대전시무형문화재 제14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십니다. 어릴 적부터 언론으로부터 천재시조인의 칭호를 받으셨던 어머니의 아들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갓난쟁이 때부터 정가를 들으며 자랐지요. ▲ 김재락 독창회 때 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 김경배 선생님과 14살 때 처음 가곡 편락을 사람들 앞에서 힘차게 불러서 주이 사람들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어릴 적엔 재미도 없고 이해가 안 되는 노래였지만 차차 이 노래가 우리의 소중한 천년의 음악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교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신 김경배교수님이 계시는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국악학과를 소개해주셨고 이곳에 진학하면서 가곡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다른 장르 예를 들면 민요라든지, 판소리나 기악에 견주면 인기가 덜한 것이 정가인데 정가를 선택한 데 대한 후회는 없는가요? 한때는 인기종목인 민속악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기도 했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너는 거문고 손을 가졌구나. 스승 칭찬에 20년을 매진 - 거문고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계기는 별다르지 않았어요. 가야금을 1년 정도 배운 뒤 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들께서 너는 거문고 손을 가졌구나.라고 말씀하셨고, 저도 거문고 소리가 싫지 않아서 전공을 거문고로 선택한 것이 지금까지 왔습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저는 거문고를 연주하기에 좋은 손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거문고는 어떤 악기인가요? 그리고 본인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지요? 거문고는 소리가 꿋꿋하고 감정에 솔직합니다. 다른 현악기 연주는 보통 터치기에 울림과 여운이 있고 길게 뽑아낼 수도 있지만 거문고는 술대로 내려치고 나면 뒤집을 수 없고 꾸밀 수도 없습니다. 이런 특징은 제 성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저도 하겠다고 하면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기에 저는 거문고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 거문고와의 삶 20년이라고 했는데 도중 어려움은 없는가요? 큰 위기가 한번 있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한 열흘 지나고 나니 손가락이 저리고 떨리고 힘이 없어졌습니다. 거문고를 그만둬야 하나고 고민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못한다고
어머니 진도씻김굿 전수조교 송순단 선생 모친 권유로 시작한 아쟁 평생 동반자로 씻김굿 어머니 얘기 석사논문으로 쓸 것 퓨전에 긍정적단 기본 확실히 다져야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제 어머니는 진도씻김굿 전수조교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국악은 자연스럽게 생활화됐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광주예술고등학교에 갔는데 1학년 때 전공을 선택해야 했지요. 그때 어머님께 장구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리북(고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곧 기본기를 닦아야 된다는 말씀이셨죠. 그러면서 힘드는데 괜찮겠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면서 판소리도 하고 싶다는 제 말씀에 집에 마침 아쟁도 있으니 아쟁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게 권했습니다. 그래서 아쟁은 제게 운명이 된 것이죠. - 어머니의 씻김굿이 무섭거나 또는 미신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았는지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조성재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미신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접신 등의 대목에서는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귀는 솔깃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숨어서 보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셨던 것이나, 여성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어떻게 송서∙율창을 하게 되었나요? 97년이었어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전주대사습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 유창 선생님이 경기민요를 했고, 장원을 받으신 거죠. 흔히 하는 말로 필이 꽂혔다고 하나요? 선생님이 민요 하시는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결국 방송국에 전화해서 선생님 전화를 확인하고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무형문화재가 되시지 않았을 때라 제자를 받지 않고 있었지요. 누가 배우러 와도 아직은 내 공부하기에도 바쁘다며 거절하실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그것도 대구에서 서울 독립문까지 찾아가 배우겠다고 하니 아마도 감동하신 모양이었어요. 흔쾌히 제자로 받아주셨고 이후 선생님께서 송서∙율창을 하시게 되어 저도 따라 하게 되었는데 제 귀에도 송서∙율창이 참 좋았습니다. - 유창 선생님 1호 제자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것도 아직은 국악 가운데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는 송서∙율창을 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저를 많이 이뻐해주셨어요. 아마도 어린 나이에 선생님이 이사
[그린경제=김영조 기자]나주로 취재를 가기 이틀 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지요? 저희 집안에선 그리 대단한 나눔을 실천한 것도 아닌데 멀리서 오셔서 실망하시면 어쩌죠? ▲ 남파고택 전경 열 번의 취재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남파고택에 뭔가 분명히 있다. 다른 종가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란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더구나 이곳은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한국고택협회 회장)의 추천이 있었지 않은가?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 종손의 이름을 따 박경중가옥이라 했지만, 최근 이 집을 지은 이의 호를 따서 남파고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암군 금정면에 세운 휼민비 구휼 입증 소작인에게 송아지를 줘 기르게 해 저희 집안이 그래도 넉넉했을 때는 고조인 박(朴) 자, 재(在) 자, 규(珪) 자 할아버지 시절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내셨는데 1860년 무렵 3~400석 규모로 천석 정도는 되어야 큰부자로 쳐줬을 당시로서는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지요. ▲ 남파고택을 지은 박재규 선생(왼쪽)과 그 손자 박준삼 선생 ▲ 남파고택 현 종손 박경중 선생 그렇게 큰부자가 아니었음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대금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혹시 아버지가 권유한 것은 아닌가요? (원완철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자 원장현류 대금산조 명인 원장현 선생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권유하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도록 지켜보시는 편이었죠. 물론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음악에 익숙했었다는 것은 대금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한문 선생님이 꿈일 정도로 꼭 대금을 한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일본 장인이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것을 본 뒤로 대금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대금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 아버지는 현대 3대 대금명인 가운데 한분이십니다. 그런 아버지가 대금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아버지는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자 첫 등록금을 대주시고는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 하셨고, 이후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KBS 국악한마당의 반주를 9년 동안이나 하게 됐는데 그때 많은 공부가 됐지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