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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에서 흐르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무심거사의 단편소설 (1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언젠가 박 과장이 이렇게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김 과장은 여자에 너무 약한 것 같아. 술집 아가씨는 술집에서 술을 따르면 되는 것이요. 괜히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격에 안 맞는 일이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어리석은 짓이요.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에게 절대로 정(情)이나 명함을 주어서는 안 돼요. 나중에 괜히 귀찮아지지요.”

 

그러나 이 아가씨는 예외일지도 모른다. 박 과장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은 존중하지만, 세상에 예외 없는 법칙은 또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 아가씨는 비록 뿌리는 진흙 속에 내리고 있지만 심성은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한 송이 연꽃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 김 과장이 말했다.

“수련이, 술집 아가씨에게는 정을 주지 말라는 말을 알고 있지만 나는 수련이를 그저 술 따르며 웃음을 파는 보통 여자로는 보고 싶지 않아.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도 선생님을 보통 손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개 손님들은 저희들을 뭐라고 할까요. 노리갯감이나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대하거든요. 그러나 선생님은 달랐죠.”

 

말없이 듣고 있던 김 과장이 말을 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만 나수련 이라는 한 여인에게 현재의 생활에 변화를 주고 다른 방향의 삶을 찾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아까부터 생각해 보았지. 오후 시간에 서예학원에 한 번 나가보면 어떨까? 내가 서예는 잘 모르지만, 검은 먹을 벼루에 갈아 붓글씨를 쓰다 보면 흩어진 마음도 모이고 또 규칙적으로 매일 할 일을 갖게 되니까 뭔가 새로운 것이 찾아지지 않을까? 학원비야 한 달에 3만 원이면 될 거야. 정 돈이 없으면 학원비는 내가 내줄 용의가 있으니까.”

 

아가씨는 말이 없었다. 아가씨는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이런 별스러운 손님은 처음이었다. 술집에서 만난 여자에게 엉뚱하게도 서예학원에 다니라니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나? 아가씨는 생각에 잠기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한번 노력해 보겠어요. 학원비는 염려 마세요.”

“그렇다면 우리 약속하자!”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술잔을 마지막으로 비운 뒤 김 과장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주며 말했다.

“수련이가 서예학원에 등록하고 한 달 동안 빠지지 않고 다닌 뒤에 나한테 전화를 해. 자네가 전화하면 내가 들릴 테니까. 하루라도 결석하면 전화를 하지 마. 그 정도의 결심도 실행하지 못한다면 나는 크게 실망하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어. 귀여운 아가씨!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겠지.”

 

김 과장은 수련이의 뺨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가야겠어. 벌써 두 시가 넘었는 걸. 오늘은 내가 취해서 허튼소리를 많이 한 것 같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안녕!”

 

 

아가씨는 아무 말이 없이 김 과장을 따라 나왔다. 밖에는 아직도 약한 가을비가 뿌리고 있었다. 한차례 바람이 휙 불자 길에 떨어진 낙엽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동했다. 김 과장이 추우니까 들어가라고 해도 아가씨는 큰길까지 따라 나와 김 과장이 택시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가느다란 비를 맞은 아가씨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두 눈에서 흐르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