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저승꽃
세월에 쫓겨 마지못해 피네 (초)
이승에서 피는 검은 저승꽃 (돌)
저승에 갖고 가나 놓고 가나 (빛)
꽃이라 하니 아름답긴 하네 (심)
... 25.1.16. 불한시사 합작시
세수하다가 문득 거울 속 얼굴을 마주하니, 몇 해 사이 검버섯이 부쩍 늘어 있음을 본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찌 당연하지 않으랴마는, 마음 한구석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피부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이 얼굴 위에 찍은 표식이며, 남은 날들이 유한함을 조용히 일러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 검버섯을 ‘저승꽃’이라 불러왔다. 꽃이라 하나 봄의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고, 기쁨보다는 쓸쓸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꽃이란 본디 피고 지는 존재,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승에서 피는 검은 저승꽃은,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피어나는 시간의 꽃이라 할 만하다.
자연을 보아도 다르지 않다. 오래된 바위의 얼굴에도 검고 희미한 얼룩들이 피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돌꽃이라 부르며, 바위에 붙은 이끼나 지의류로 여긴다.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나, 그 위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흔적을 남긴다. 수천 년의 바람과 비, 햇볕과 서리가 겹겹이 쌓여 바위의 얼굴을 바꾸고, 그 위에 돌꽃을 피운다.
사람의 얼굴에 핀 저승꽃과, 바위의 얼굴에 핀 돌꽃은 서로를 비춘다. 하나는 유한한 생명의 피부 위에, 다른 하나는 거의 영원에 가까운 돌 위에 피었으되, 둘 다 세월 앞에서는 다르지 않다. 생‧노‧병‧사는 인간만의 일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함께 겪는 변화의 리듬이다. 막을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며, 다만 받아들이고 읽어낼 뿐이다.
그러므로 저승꽃은 부정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늙음의 낙인이 아니라, 여기까지 살아온 시간의 증명이다. 바위가 돌꽃을 달고도 바위이듯, 사람 또한 저승꽃을 품고 여전히 사람이다. 꽃이라 부르니, 비록 검을지라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은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얼굴과 자연의 얼굴 위에 조용히 피어나며 함께 늙어간다. (초암)
|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