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0 (토)

  • 흐림동두천 26.5℃
  • 흐림강릉 31.7℃
  • 흐림서울 27.5℃
  • 흐림대전 26.2℃
  • 대구 24.4℃
  • 천둥번개울산 23.4℃
  • 구름많음광주 27.5℃
  • 구름많음부산 29.1℃
  • 구름많음고창 29.1℃
  • 맑음제주 35.4℃
  • 흐림강화 26.2℃
  • 흐림보은 24.7℃
  • 흐림금산 24.9℃
  • 구름많음강진군 30.3℃
  • 흐림경주시 24.3℃
  • 흐림거제 2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송원조의 북은 단순 명료함이 특징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8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12마당의 이름은 조선조 순조(1800-1834년) 때,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에 보이고 있고,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일제 말(末)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에도 소개되어 있다는 점,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수궁가>는 순조 때의 명창인 송흥록에서 송광록-송우룡-유성준의 뒤를 이어 정광수, 박초월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송우룡-송만갑-박봉래-박봉술로 이어져 온 수궁가와 경기ㆍ충청의 중고제는 전승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 논산 김남수 고법 발표회에서 <수궁가>를 완창해 준 젊은 소리꾼, 박현영 명창에 관해서도 소개하였다.

 

북을 잘 치고, 못 치는 하는 문제는 별도로 논의한다고 해도, 논산의 김남수가 그의 고향, 논산에서 13번째 고법발표회를 열었다는 열정은 높이 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발표회 때마다 판소리 명창들을 초대해서 지역의 판소리 음악을 확산해 나가는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김남수는 전라북도 고법 보유였던 주봉신에게 배웠다. 주봉신은 고 박동진의 전속 고수로서 전국을 다니며 박동진과 호흡을 맞추었던 사람이다. 그의 북은 힘이 실려 있는 묵직한 소리가 일품이었다.

 

글쓴이의 기억으로 소속 대학에서 판소리 특강이 있거나, 특별 공연을 할 때 박동진 명창을 초대하면, 그 무대에는 반드시 주봉신 명고가 북을 잡았다. 음악을 통한 호흡도 일품이려니와 무대 위에서의 즉석 대화도 구수해서 많은 학생이 즐겁게 웃으며 감상했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러나 박동진이 세상을 뜨고 주봉신도 떠나게 되니, 김남수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송원조 명고를 찾아가 고법을 배우며 다듬고 있다. 김남수가 뒤늦게 만난 송원조 명인은 어떤 고수인가?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송원조는 10대에 <이리국악원>에서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해서 국악원 총무가 될 정도로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국악계 여러 선생에게 소리도 배우고 북도 배우면서 실력을 쌓았는데, 특히 인상에 남는 기억은 당시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던 김연수 명창이 동초제 판소리를 짤 때, 밤새도록 북을 쳐 주면서 칭찬과 꾸지람을 받으며 그를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송원조 명고는 60년대에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고수의 생활을 접고 상경하게 되었는데, 고수의 길이 아닌, 인쇄업이나 부동산 관계의 일을 배우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판소리를 부르고 북을 치던 일이 진하게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소리꾼들과 만났고, 북을 쳐 주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고 한다. 음악과 맺은 인연이 그렇게 쉽게 잊히겠는가!

 

악기 연주자가 젊은 시절에 맺은 연주 경험이나 소리꾼 마음속에 담고 있는 가락들은 영원히 살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비록 그 관련 작업을 멈추었다고 해도, 단절은커녕, 더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아는 특유한 감정일 것이다.

그는 북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어 함께 연습하기도 했다. 북 치는 활동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을 1976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당대 으뜸 고수로 인정을 받고 있던 명고수 김명환이 송원조에게 제자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명환의 후계자가 된다면 고수로서의 성공은 보장받았을 텐데, 왜 거부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북을 치며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좋았으나 무대에 앉아 직업적인 고수로 사는 것보다는 판소리를 부르고, 북을 치면서 즐기며 살고 싶은 마음에서 그 제의를 거절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박송희, 성우향, 성창순, 김일구, 김수연을 비롯하여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국악인들과는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는데, 이들은 만날 때마다“ 국악의 길로 함께 가자”라는 진심 어린 권유를 해 주었고, 그 스스로 송충이와 솔잎의 관계를 떠 올리며 자문자답하다가 드디어 고수의 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동현 교수는 “송원조의 고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그의 북가락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글쓴이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평소 송원조는 고수가 갖춰야 할 3가지 요소를 말하곤 했는데, 첫째는 고수가 북을 잡고 앉아 있는 자세가 당당해서 소리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점, 둘째는 북가락이 단순하면서도 분명해서 소리꾼에게 장단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점, 셋째는 추임새를 적재적소에 넣어주어 창자가 소리 실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는 점을 강조해 온 것이다.

 

그래서 송원조 본인은 북가락보다는 추임새를 더더욱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선배 고수가 소리꾼에게 보내준 추임새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소리판에서 잠시 휴식 기간은 있었으나,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송원조 명고는 서울시 고법 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제자들도 두었고, 고법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명고수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