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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송원조, 북장단으로 김연수 명창을 돕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8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송원조 고수(鼓手)의 보비위(補脾胃)정신, 곧 소리꾼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고수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다양한 양념이 들어 있지 않음에도 또 다른 맛의 묘미를 전해주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이야기, 그는 거의 원 박을 반복하다시피 치면서도 강과 약을 분명하게 조절해 주기 때문에 단순, 명료하면서도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송원조를 성공한 고수라고 평가하는 배경이라든가, 또는 송원조 자신이 지금까지도 절실하게 후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말은 다름 아닌, 소리판의 성공적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소리꾼의 기량’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하는 으뜸 명고수도 소리꾼으로 하여금 그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고법(鼓法)의 기본 정신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 고법의 예능보유자, 송원조의 고법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함이라든가, 명료함, 또는 겸손함과 같은 덕목들은 바로 송원조 자신의 인격이어서 자신만의 특징을 여지없이 들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분야의 관계 전문가들은 그가 구사하는 단순한 가락들은 강약의 처리를 극적으로 배분하여 북을 치기 때문에 단순하게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명료함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 점도 송원조 가락의 특성이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들은 자신이 10대부터 익힌 《이리국악원》의 영향, 더 분명하게 말해서 어린 시절부터 소리꾼 출신의 최광렬 스승으로부터 고법을 배운 것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최동현의 말이다.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리꾼의 기량이라고 한다면, 소리꾼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고법이야말로 정말 좋은 고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송원조의 고법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함, 명료함, 겸손함, 봉사, 등의 덕목은 바로 송원조 자신의 인격이기도 하다. 송원조라는 한 고수의 매력은 바로 이렇듯 예술과 인생이 일치되는 데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송원조가 《이리국악원》에서 공부하던 때는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로 보인다. 당시 이리국악원의 초청강사로 김연수 명창이 내원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강하러 오는 날이면 김연수 명창은 어김없이 판소리의 새로운 사설을 적어 오고, 그 사설에 적절한 가락이라든가, 장단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송원조는 자연스럽게 김연수의 옆에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북을 쳐주며 3년여 김연수 명창을 도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매일매일의 작업이 힘들기는 했어도 지금 돌이켜보면, 김 명창과 밤늦도록 북을 치며 새로운 사설에 걸맞은 장단을 쳐보던 기억이야말로 그의 일생에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판소리의 기존 사설을 수정하거나 새로 만들고, 여기에 새로운 곡조와 장단을 짜는 작업을 힘겹게 진행하면서 젊은 송원조에게 북장단을 치게 했던 김연수 명창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그 이후, 서울 <중동중학>에 진학하면서 신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웠고, 정정렬에게는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웠다고 하며 1935년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한 이후, 송만갑에게 <흥부가>와 <춘향가> 등 5바탕을 배워 명창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50년대 이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단의 대표주자였던 <우리국악단>을 창단, 수많은 공연활동을 한 인물로도 유명하고, 1957년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 원장, 1960년대에는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1973년에는《국립창극단》 단장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김연수가 고쳐 만든 소리제는 동편(東便)의 웅장함과 서편(西便)의 애잔함이 함께 어우러지는 판소리로 알려져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새롭게 고쳐 만든 판소리를 <동초제> 소리라 부른다. 그 이름은 김연수의 아호가 <동초(東招)>이기에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東招制)>, 또는 <동초 김연수제>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동초제 판소리야말로 서편의 애잔한 소리제와 동편의 우람한 소리제가 서로 융합되어 있으며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가사 전달이나 맺음, 끊음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너름새(동작) 또한 정교하며, 다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연수 명창이 판소리 5바탕을 정리 출판한 일은 동리 신재효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설에 일일이 장단을 붙이고 발성까지 지도해 놓아서 후학들의 판소리 교육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