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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초입 계곡의 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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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앞 헬기장에서 본 마니산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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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동천 정수사로 가는 능선에서 본 참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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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는 참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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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의 전경 개방시간 전(동절기 하절기 개방시간이 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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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아침 개방시간 이후 사람들이 밀려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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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안에 있는 보호수 소사나무(수령 150년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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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아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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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에 있는 향로, 향도 없고 향을 사를 분위기도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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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중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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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바탕으로 우주의 원리를 표현한 원방각과 한민족의 최고경전인 천부경이 새겨진 펼침막을 걸어놓고 참배객이 아닌 등산객들에게 뭔가를 꼭 알려주고자 하였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이 흘러드는 바다에 자리하고 있는 강화도에는 많은 역사유적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적이라하면 신석기와 청동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한민족 문화유적 마니산 참성단이다.
참성단은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단군이 세운 제단으로 강화도 마니산의 꼭대기에 정방형의 제단을 쌓고, 그 아래에는 둥근형태의 석축을 쌓았다. 강화도가 섬이기에 섬에 있는 산이 얼마나 높을까 싶지만, 한번 오르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이전에 일찍 올라보고자 6시에 등산을 시작하고 보니, 참성단에 도착한 시간이 7시 30분이었다. 그러나 참성단의 주변에는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있고, 입구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있는 헬기장에서 떠오르는 태양빛에 참성단의 모습을 담아보고, 또 동쪽 산능선을 따라 함허동천과 정수사로 가는 봉우리까지도 가보았다. 그리고 그 산꼭대기에서 참성단을 향해 서보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빛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마니산과 참성단 그리고 주변의 경계까지 볼수있어 더욱 좋았다. 강화라는 섬이 크리 크지 않은 듯 싶지만, 섬 안에 471m의 높은 산이 솟아있고, 끝까지 오르자면 계단수만도 일천 수백개에 이르는 만큼 결코 쉽지 않은 산행이었다.
아침 9시 30분 참성단 개방 시간이 되어 다시 참성단으로 돌아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고, 등산로는 오르고 내리기도 힘들만큼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더 지체했다가는 참성단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듯 하여, 출입계단을 통하여 참성단에 올랐다.
참성단이란 말 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이곳 참성단은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니산의 맨 꼭대기에 있어,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을 연결해주는 곳이라하여, 이곳에 제단을 쌓았다고 한다. 최근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생각하여 무시해버리지만, 참성단을 놀이터가 아닌 유적이고 성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다.
참성단 위에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참성단이 관광시설이나 놀이터가 아님을 꼭 알려주고자 하시는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스님은 인천에서 새벽에 길을 나서 배낭에 물한통을 짊어지고 올라와 참성단의 입구쪽에 있는 우물에 물을 붓는다고 한다. 그 연유를 물으니, 스님의 대답은 그 물을 마중물로 삼아 이곳 우물에 자연적으로도 물이 올라와야만 앞으로 한민족이 문화가 번창하고 하늘과 조상과 자손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70을 바라보는 노스님이 조상을 잃어버닌 한민족의 현재가 너무도 참담하여 이렇게라도 한다는 것이었다. 힘들지만 100일을 정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다고 말했다.
참성단의 설립에 대하여는 역사적 사실로 알려져 있다. 그 유래에 대하여 참성단 바로 옆 바위벽에 새겨진 조선 숙종대 최석항이 중수하고 남긴 기록을 번역문에 따라 다시 옮겨본다.
참성단 중수기(조선 숙종 43년 강화유수 최석항)
우리나라 국토 수 천 여리를 통틀어 강화는 나라의 방패가 되는 중요한 곳이다. 수 백리에서도 마니산은 나라에서 제사를 드리는 명산이다. 이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든 곳이 있으니 이곳이 참성단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국조 단군께서 돌을 쌍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건대 연대가 오래되어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서쪽과 북쪽 양면이 반쯤 무너졌으며, 동편 계단 또한 많이 기울어져 이 고을 여러 어른들이 서로 더불어 개탄한 지 오래되었다. 부족한 내가 이곳의 유수로 와 이고을을 지키게 되어 올 봄에 고을을 두루 살피면서 시험삼아 한 번 올라가 보았는데, 분연히 이곳을 중수할 뜻이 생겨 선두포 별장 김덕하, 전등사 총섭승 신묵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여 다시 쌓게 하니, 열흘이 채 아니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
아! 무너진 곳을 일으키고 고치어 옛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고을을 지키는 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시어 실로 우리 동국 백성의 조상이 되시는데, 순수 단을 쌓아 하늘에 청결한 제사를 드리던 곳임이랴! 수 천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신묵이 이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이를 알리기를 청함에 이를 써서 기록하는 바이다.
정유(1717, 숙종 43) 단양월(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이 기록하다.
이렇게 기록된 비문이 마니산 꼭대기 헬기장의 동쪽 등산로 아래 바위벽에 새겨져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최근에 이를 번역한 번역안내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민족의 시원이 어디에 있는지 많은 논란들이 있다. 최근에는 외래종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단군을 신화적인 인물로 우상화로 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옛부터 우리민족을 한민족이라 하고, 역사적으로 시련이 있을 때마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으로 하나가 되어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였다.
일제에 나라가 빼앗길 위기에 처해있을 때,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우리민족이 고래로 별개의 민족들이 살았던 것이 아니며 나라는 나뉘었지만 민족만은 한민족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을 깨닫고 "한"민족을 내세워 대한제국이라고 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광복은 되었지만 한민족이라는 그런 자긍심을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볼 때, 나라는 되찾았으나 역사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후손들이 된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여 이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한민족의 조상으로 단군은 커녕 고조선의 역사자체를 부인하는 마당에 더 말해서 무엇할까 싶어진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선생의 말이 또 생각이 난다. 이제는 나라를 찾고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기에 앞서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한민족이 남이 아닌 동족이라는 역사의식부터 되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역사적 사실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기록에서는 많이 소실되었지만, 이웃나라 중국의 역사서에 수도 없이 기록되어있으며, 그 역사의 현장은 지금도 관심만 가진다면 얼마든지 증거하고 있다. 다만 이를 보려는 눈이 없어 못볼 뿐이다.
마니산에 참성단이 있지만, 참성단은 관광시설이 아닌 민족의 성스러운 제단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라면 그저 등산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가 아니라 조상을 찾는다는 경건한 마음가짐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이 높고 험한 곳에 무거운 돌들을 모아서 이렇게 제단을 쌓고 하늘에 경배드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런 일을 했다는 단군이하 조상들의 공이 모두가 헛된 일이 되고나면 우리들의 정체성도 함께 사라지고 말 일이기 때문이다. 참성단에 올라 커다란 향로는 있었지만 향로는 안타깝게도 향한자루도 사를 수 없는 빈향로였다. 이래가지고야 어찌 한민족과 민족의 성인이라는 단군을 바로 모신다고 할수 있으랴 싶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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