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고무공장 어린 여공 보듬은 "강주룡"
숨 쉬기도 거북한
고무탄내 자욱한
공장 안에서
폐부에 달라붙어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의 그림자
뒤로하고
힘겨운
작업량 채우며
하루하루 버티던
어린 소녀들
밥이나
제대로 먹게 해주라고
울부짖던
그대는
여공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유치(留置) 중인 강주룡, 단식 74시간, 을밀대 위에 올라갔던 여직공, 감임취소(減賃取消)해야 취식(取食)한다.” 이는 1931년 6월 2일 동아일보 2면에 큼지막하게 나온 강주룡 (姜周龍, 1901~1932.6.13) 애국지사의 기사 제목이다. 단식 74시간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거기다가 노동쟁의를 위해 평양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갔다는 말도 예사롭지 않은 말이다.
서른 한 살의 강주룡 애국지사는 어째서 단식 74시간에 들어갔던 것일까? 74시간이라면 만 3일하고도 2시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곡기를 끊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강주룡 애국지사의 단식 사건은 1931년 6월 2일치 기사 말고도 각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강주룡 애국지사는 1931년 5월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왜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는 한편,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감히 여성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강주룡 애국지사는 해낸 것이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 애국지사는 14살 때 서간도로 이주하여 통화현의 최전빈과 결혼했다. 24살 때 채찬(蔡燦 다른 이름 백광운)아래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남편이 순국하자, 강주룡 애국지사는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여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정착, 평원 고무공장의 여공으로 일하며 가장 노릇을 했다. 1930대초 평양에서는 고무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고무공업이 타격을 입자, 고무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1930년 8월 1일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이 결정에 따라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자, 노동자들은 일제와 그에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강주룡 애국지사는 1931년 5월 평원 고무공장 파업 주도를 하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던 그는 투옥 중 극심한 고문으로 보석 출감되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출감 두 달 만에 서른한 살의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 , 6권 가운데>
*강주룡 애국지사를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1~6권,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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