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여성단체 송죽회로 투쟁한 ‘김경희’
찬 서리 내려야
비로소 푸르름 드러나는
소나무
한바탕 비바람
흩뿌린 뒤에야
쑥쑥 크는
대나무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오직 조국 광복을 향한
곧은 절개
송죽(松竹) 닮았어라
김경희(金慶喜,1888~1919) 애국지사는 31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늙으신 어머니와 동지들에게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엇이 그 짧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독립의 끈을 놓지 않게 한 것일까?
김경희 애국지사는 평양 출신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생 애희가 미국에 유학을 했고 막내 동생이 북경을 거쳐 일본 교토로 유학을 갈 정도로 부모님은 이들 세 자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숭의여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1913년 25살 무렵 황애덕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펼쳤다.
송죽회(松竹會)는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애덕, 졸업생 안정석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이다. 송죽회는 푸르른 소나무(松)와 절개를 뜻하는 대나무(竹)를 합한 것으로 민족에 대한 곧은 절개를 실천한 단체였다. 송죽회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조직의 출발점으로 조직형태는 철저한 점조직이었으며, 회원명단도 만들지 않고 이름도 별명을 사용하는 등 비밀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회원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수예편물 등으로 자금을 마련, 월회비를 납부케 하여 적립된 자금을 해외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으며 국내에 숨어들어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에게 필요한 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양시내 교회부인회와 함께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여성 계몽운동을 추진해 갔다. 1916년 이 모임은 지방조직을 만들었는데 대부분 이 학교 졸업생으로 장로교 계통 여학교 교사인 회원을 지방 조직책으로 삼아 확대시켜 나갔다.
이들은 조직을 성공리에 이끌어 일제 말기에는 일본·하와이·미국 본토에까지 조직이 확대되었다. 송죽회에 참여했던 김경희 애국지사를 비롯한 교사들과 여학생들은 이후 한국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밑거름 구실을 하였다. 이 조직은 1910년대에 존재했던 다수의 비밀결사 조직 가운데 여교사와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김경희 애국지사를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1~6권,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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