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

2019.07.26 11:05:09

쾌락의 길, 고행의 길이 아닌 중도(中道)를 배워라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1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잠이 깨었다. 지금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6시 30분일 것이다. 어제 달라이 라마와 찍은 기념사진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생 카톡방에 각각 올렸다. 나만 잠이 없는 것이 아닌가 보다. 지금 시각에 깨어 있는 친구들이 많다. 친구들이 사진을 보고서 댓글을 달았는데, 내가 달라이 라마를 닮았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달라이 라마가 나의 형님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달라이 라마와 나는 나이로는 15살 차이가 난다.

 

달라이 라마 사원을 방문했을 때에 정문 들어가자마자 왼쪽 벽에 아래와 같은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사진을 찍어 왔다.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친절을 강조한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강조하는 윤리를 세속윤리(secular ethic)라고 말하는데, 세속윤리를 전파하기 위한 조직이 있고 누리집(www.secularethic.org)까지 만들어 놓았다.

 

 

누리집에 들어가 읽어 보니, 세속윤리는 신앙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인 발견 그리고 상식과 경험에 근거를 둔 윤리체계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매년 11월 3일을 ‘친절의 날’로 기념한다고 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친절을 가장 큰 덕목으로 보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다면 그의 국적, 종교, 사상, 교육에 관계없이 그는 좋은 사람이며 친절한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

 

법정 스님이 2008년에 쓴 마지막 책 《아름다운 마무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이러한 주장은 그 전에 이미 나왔다. 법정 스님은 2004년 하안거 해제 법문에서 친절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인가? 불교도 기독교도 혹은 유태교도 회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유치원 다니는 어린 아이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이다. 유치원 어린이가 친절하다면 그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 어린이가 자라서 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기까지 친절함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다면 그는 힌두교의 베다, 유교의 사서삼경, 불교의 8만대장경, 기독교의 신구약 성경, 그리고 이슬람의 코란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친절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우리가 어떤 덕목을 지식으로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실천하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할 때에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친절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니고 깨달았다. 톨스토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구걸하고 있는 거지를 만나게 됐다. 주머니를 뒤지던 톨스토이는 돈이 한 푼도 없음을 알고 미안한 마음으로 거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형제여, 제발 화내지 마시게. 지금 가진 돈이 한 푼도 없다네. 만약 나에게 돈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드렸을 걸세" 그 말을 들은 거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제가 원하던 것보다 더 좋은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저같이 초라한 사람을 형제라 불러주었으니까요"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똑똑하기 보다는 친절한 편이 낫다.” 맞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지식이 많은 아이, 똑똑한 아이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교육 목표가 잘못 되었다.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친절을 가르치고 친절을 실천하게 교육시켜야 한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똑똑한 수재들이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는 주역이 되기도 한다.

 

우리 두 사람은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간단히 먹고 전날 갔던 카페에 다시 갔다. 로자 씨와 현철 씨도 카페에 나와 있었다. 병산과 나는 내일 다람살라를 떠나기 전에 히말라야 산맥을 걷고 싶었다. 네 사람은 차를 마신 후 눈 덮인 히말라야 산봉우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길을 조금 가다가 벽돌을 싣고 있는 당나귀를 보았다.

 

 

히말라야에서 중요한 운송 수단은 야크와 당나귀이다. 야크는 소과여서 뿔이 있고, 당나귀는 말과여서 뿔이 없다.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이 야크이다. 히말라야에서 야크는 짐을 운반하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로 활용된다. 야크 젖을 짜서 마시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야크 가죽은 옷을 만드는데 쓰인다. 야크 똥은 말려서 연료로 사용한다. 야크야말로 티베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이다.

 

 

짐을 싣고 있는 당나귀를 보자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당나귀는 얼마나 힘들까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전 6년 동안 온갖 고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석가모니는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고행을 했다는 점이 당나귀와는 다르다. 그런데 의문이 났다. 꺠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행이 꼭 필요할까? 자료를 검색해 보니 부처님은 깨달은 후에 제자들에게 고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수행하는 사문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행위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내 맡겨버리는 쾌락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육체를 너무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사문들은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배워야 한다.“ 곧 석가의 가르침은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도 피하고 육체의 욕구를 100% 따르는 쾌락도 피하라는 것이다. 석가가 말한 중도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상훈 교수 muusim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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