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간운하, 강제 동원의 흔적 대신 유람선 명소로

  • 등록 2025.07.27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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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베3댐의 조선인강제노동현장을 찾아서 <3>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우오즈(魚津)로 향하던 길에 필자는 도야마(富山) 시내의 후간운하(富岩運河)에 있는 나카지마(中島) 갑문을 찾았다. 도야마와 이와세(岩瀬)를 잇는 총연장 7km의 이 운하는 1930년에 착공되어 1935년에 운항을 시작한 일본 근대식 운하다. 당시 목재, 원재료, 군수물자 등을 실어 나르는 주요 수송로 역할을 했다.

 

운하 준설로 파낸 약 130만㎥의 흙은 도야마 시내를 흐르던 사행천 진즈가와(神通川)의 폐천부지(지자체의 시내를 곧게 정리하는 공사 따위로 인해 물줄기가 바뀌면서 땅이 된 곳)를 메우는 데 사용되었으며, 운하 덕분에 물자 이동이 쉬워지자, 운하 주변에는 군수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산업 발전의 기반을 이루었다. 현재는 운하 양옆으로 벚나무가 줄지어 선 공원이 조성돼 시민과 관광객이 유람선을 즐기는 명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운하 뒤에는 조선인의 혹독한 강제노동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관련 자료 중에서 먼저 《구로3댐과 조선인 노동자》(53쪽)에 따르면, 구로베(黒)3댐(구로베가와 제3발전소) 건설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70~80명 가운데 약 30명이 댐 완공 뒤 후간운하의 이와세 방면 공사로 재배치됐다. 1940년 박경호 씨가 조선에서 모집한 200명의 노동자 가운데 일부였다. 이들은 공사 현장 초입의 파출소에 의해 항상 감시를 받았고,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64쪽)는 그들의 임금은 낮았으며, 필요 이외의 현금은 받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갑문 앞에서는 마침 유람선이 통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간운하는 강물과 바닷물의 수위 차이가 약 2.5m에 달해 파나마 운하식 갑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유람선이 도크에 진입하면 수문을 닫고 반대편 도크로 물을 빼내 배의 높이를 조절한 뒤, 바다 방향의 문을 열어 유람선을 내보내는 방식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90대 할머니는 “어릴 적 이곳에서 놀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타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며, 그러기 위해 이웃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라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

 

 

후간운하는 일본 산업화의 상징이자 오늘날의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 이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희생과 그 전쟁으로 고통받은 일본 시민들의 상처가 함께 남아있다.

 

 

류리수 기자 ristina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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