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건의 묘비에 그려져 있는 가야금

2020.02.17 21:56:11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59]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심상건 명인의 넷째 딸, 심태진이 현재 99살의 노인임에도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가야금산조와 병창, 단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지도방법은 1:1 개인지도로 매우 엄격하였으며 제대로 못 하면 대나무로 어깨를 맞았다는 이야기,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산조는 즉흥적이어서 오르지 한성준이 그 장단을 맞출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심상건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속음악, 특히 가야금산조와 병창, 기악의 명인으로 무대나 방송, 음반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러나 주권을 잃었던 불행의 시대를 보낸 국악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변화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즉흥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산조를 탈 때마다 매번 달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리켜 선생 없이 자학(自學), 자득했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심상건은 해방 직후, 조택원 무용단의 일원으로 넷째 딸, 심태진과 함께 미국의 원정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귀국해서도 그의 공연활동이나 방송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산조나 병창을 제일 많이 배운 딸, 심태진은 미국에 남아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어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심상건은 1950년대에 들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래서 명인명창에게 수여하는 국악진흥회의 공로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5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심상건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비보만 전해 주었다. 현재까지 그의 묘소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그린우드 묘지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묘비에는 후손들에 의해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줄을 풀고 죄는 맛이 있어 산조를 즐겨 탔다.”고 말한 심상건의 음악미학은 지금도 간간히 인용되고 있다. 그의 묘비에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으로도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가야금을 좋아했고, 가야금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음악이 인정받고, 한국의 대표적인 가야금산조의 명인으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숙부 심정순의 소리제가 스며 있었다는 점이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심정순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숙부가 부르던 중고제 판소리를 아침저녁으로 들으며 자랐던 그였기에 중고제 판소리 가락이 그의 산조가락 속에 녹아 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이 되는 것이다. 실제의 연구논문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심상건의 가야금산조가 중고제 판소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점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의 숙부 심정순의 중고제 판소리는 그의 막내딸 심화영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과연 심정순은 어떠한 소리꾼이었는가?, 그가 부른 중고제 판소리는 어떠한 소리였는가? 중고제 판소리는 과거 서울 경기지방과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제(古制)의 한 유형으로 보고 있다.

 

 

노재명의 책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를 보면, 충남 결성(홍성의 옛 이름) 지방의 최선달이라든가, 또는 목천의 하한담 등이 중고제 판소리의 초기인물로 소개되어 있으며 뒤를 이어 1800년대 전반기에는 방만춘이나, 고수관 등이 유명한 소리꾼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또한, 금강유역의 김성옥-김정근-김창룡 가문과 이동백, 황호통과 같은 명창들에 의해 중고제 판소리가 활발하게 불렀다는 점, 일제강점기에는 심정순, 심상건과 같은 심씨 가문의 중고제 소리가 있어서 그 아래 세대에게 이어주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추론(推論)이 되겠지만, 초기의 판소리 판은 열린 공간에서 소리꾼의 다양한 목 재주나 재미있는 동작, 멋진 가락으로 관중의 발걸음을 잡아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목소리로 동물의 소리를 흉내 내거나 새소리를 묘사한 새타령을 재미있게 꾸며 부른다거나, 슬픔을 극대화하여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 이별의 노래가 주된 내용이 되기도 했고, 또는 성(性)적으로 음란스러운 이야기 등을 전개하여 관중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농어촌의 열린 마당에서 이렇게 단순한 흥미 위주의 소리, 또는 재미 중심으로만 소리판이 유지된다면 그 결과는 소리꾼도, 관중도 만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사람이 같은 내용으로 소리판을 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마치 텔레비전 광고를 보는 것 같아서 당연히 구경꾼은 줄어들 것이고, 관객이 줄어들면 무엇보다도 소리꾼의 생계가 어렵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소리꾼들은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 경기권으로 무대를 옮겨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곳에는 지식인 계층이나 소위 양반층을 비롯하여 소리의 애호가들이 모여들기에 이들을 만족시킬 만한 더 세련되고 감동적인 소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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