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일부 부녀자만 썼으며, 언문이란 말로 푸대접을
받았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슬옹 박사의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한국문화사, 2005)란 책을 보면 당당하게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종실록 20년(1565년) 9월 15일의 “중궁이 언문 교지로~”, 광해군일기 원년(1608년) 2월 14일자의 “대왕대비의 언지에 계자를 찍어 빈청에 내리기를~”, 정조실록 10년 (1786년) 12월 1일의 “왕대비께서 빈청에 언문으로 하교하기를~” 등의 기록을 보면 대왕대비, 왕대비, 중전처럼 내명부의 어른들은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언문교지를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신하들도 언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언문은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문과는 또 다른 공식 언어였으며, 많은 사람이 언문을 익히고 썼습니다. 쉽게 배우는 훈민정음은 이렇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