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행기대승정이 창건한 이끼절 ‘서방사’

2020.08.11 22:10:20

[맛있는 일본이야기 562]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눅눅한 장마철이라 그런지 집안이 몹시 습하다. 가죽가방이나 허리띠에 곰팡이가 피어오르는가 하면 부엌에서 쓰는 대나무 채반에도 곰팡이가 한가득 피었다. 연일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춘 날, 간만에 마을 앞산을 산책했다. 앞산이라고는 했지만 거의 공원 수준인 앞산은 그동안 비 때문에 산책 못 한 사람들이 제법 나왔다. 산길을 걷노라니 예전에 눈에 띄지 않았던 이끼가 나무 밑둥 쪽으로 쫙 깔렸다. 푸르른 모습이 제법 볼만하다.

 

이끼를 바라다보고 있자니 교토의 서방사(西芳寺, 사이호지)가 떠오른다. 서방사는 이끼가 많다고 해서 아예 이끼절(苔寺, 코케데라)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적절한 표현일지 몰라도 “이끼 하나로 먹고 사는 절”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만큼 서방사의 이끼는 유명하다. 이끼 종류만 무려 120종이라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지금은 이 절을 찾아가기 위해 절차가 필요하다. 이끼 낀 정원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객을 제한하려는 방법으로 왕복엽서에 방문 일자를 써서 절에 신청한 뒤 답장을 받아야 비로소 입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치 초기(1868년)만 해도 서방사는 폐허 상태였다. 명치왕(明治天皇)이 이른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을 만들어 불교탄압 곧 폐불훼석(廃仏毀釈)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많은 절이 간판을 내렸고 승려들은 옷을 벗고 산문(山門)을 떠나야했다.

 

그렇게 내 버려진 서방사 경내는 이끼들의 천국이 되었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 이끼로 뒤덮인 서방사 경내는 그것이 매력으로 현재는 특별명승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이끼절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방사가 이끼절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8)까지만 해도 정원은 고산수(枯山水, 가레산스이라고해서 자갈이나 모래와 돌등으로 꾸민 일본의 전통정원) 형태였으나 두 차례의 홍수를 만난 데다가 절이 있는 곳이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어 다른 절의 고산수 정원처럼 꾸미지 못하고 그냥 이끼 낀 상태로 놔둔 것이 오히려 명소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정원을 설계한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 선사는 임제종(臨済宗)의 선승(禅僧)이자 이름난 정원가로 알려졌으며 서방사를 중흥시킨 분이기도 하다. 일본전통 정원 설계자의 권위를 가진 무소 소세키 선사가 설계한 정원에 낀 이끼라서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서방사를 중흥시킨 이가 무소 소세키라면 서방사를 처음으로 개산(開山)한 사람은 행기(行基, 668-749) 대승정(大僧正)인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행기대승정이 백제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원형석서(元亨釋書)》(1322)에 따르면 행기대승정은 백제국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釋行基世姓高志氏。泉大鳥郡人。百濟國王之胤也。) 행기대승정은 생전에 49곳의 사원을 짓고 제방 15곳, 항구 2곳, 다리 6곳, 빈곤자를 위한 숙박시설 9개 등을 설립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이끼절인 서방사인 것이다. 습기를 먹고 자라는 이끼, 그 이끼가 창궐할 만큼 올여름 비는 하늘이 열린 듯 내리고 있다. 일본에도 한국에도 말이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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