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랑스러운 유물이라니

2021.01.11 12:15:33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사랑스런 옛 물건 이야기
[서평] 《오늘의 사랑스런 옛 물건》, 이감각, 책밥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물(遺物).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 이 묵직한 어감에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책 속 유물이 뿜어내는 귀여움에 갑자기 무장해제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지금은 유물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실은 예전에 문방구로, 장신구로, 가구로 자연스레 썼던 물건들이다. 오늘 내 책상 위, 옷장 안에 있는 물건 역시 100년 뒤에는 박물관에 있을지라도 지금은 무심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는 유물도 한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이해인과 이희승, 두 저자는 이런 일상성을 눈여겨보았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각종 소품을 선보이는 디자인 브랜드 ‘이감각’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디자인한 소품은 기발한 디자인과 발랄한 감각으로 전통을 무심한 듯 일상으로 들여놓는다. 이를테면 복주머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방,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릴 만큼 유난히 많았던 호랑이 이야기에서 착안한 각종 호랑이 관련 소품은 전통을 일상에서 즐기는 유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책의 서문에서 밝히듯, 이들은 북유럽이나 일본, 미국은 그 나라 특유의 디자인이 있는데 우리나라만 이렇다 할 ‘한국 디자인’이 없는 게 싫었다. 게다가 신라의 금관이나 고려의 청자는 그 화려함이 비할 데 없는데도 한국의 미감이 ‘소박’, ‘단아’와 같은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것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한국 고유의 미감을 찾기 위해 자주 박물관에 들렀고, 박물관에서 본 인상깊은 유물들을 트위터에 ‘오늘의 사랑스런 옛 물건 소개’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때 올린 글들을 다듬고, 140자만으로는 아쉬웠던 유물 해설을 보완해 엮은 것이다. ‘사랑스런’ 유물을 소개하는 책답게 표지와 판형도 자못 사랑스럽다. 페이지 왼편에는 유물 사진, 오른편에는 설명을 담은 간결한 구성이 돋보인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설명하듯,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기발랄하게 설명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이들의 입담 덕분에 한층 생명력을 얻은 유물들은 홈데코(실내장식), 퍼니처(가구), 다이닝(식기), 데스크(문구), 패션(의류 및 장신구), 아웃도어(휴대용품), 기타의 7개 장으로 나뉘어 저마다 매력을 뽐낸다. 필자가 각 장에서 특별히 귀여운(!) 유물들을 골라봤다.

 

<홈데코>

시계 (p.44-45)

이 앙증맞은 시계 좀 보세요. 양쪽으로 문이 활짝 열리는 가죽 집에 사는 친구입니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이라 시계만큼이나 아주 제대로 만든 시계 집이 있어요.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잠금장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어 그 당시 시계를 얼마나 귀중하게 보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계 위의 손잡이는 접이식으로, 보관할 때는 접어서 넣어 둘 수 있었어요. 배춧잎 같은 손잡이 하며 동글동글 다리까지 세세하게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많은 물건입니다. 선물로 받았다면 두근거리며 시계 집을 열었다가 귀여움에 ‘악!’하고 쓰러졌을 거예요. 아라비아 숫자가 쓰인 서양식의 비교적 최근 물건.

 

 

<퍼니처>

금동 곰모양 상다리 (p.48-49)

유럽의 어느 호텔 로비에 오브제로 놓여 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이 곰은 놀랍게도 낙랑시대 상다리입니다. 상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곰이라니, 이거 정말 디자이너의 재치 아니냐고요. 첫눈엔 작고 아기자기해 귀여운 곰돌이구나 싶다가도, 볼수록 포효하고 있는 표정하며, 각 맞춰 꿇어앉은 모습하며 꽤 세 보이는 외관입니다. 처음엔 상이 무거워 신경질이 났나 했는데 보란 듯 한쪽 팔로만 들어올린 모습을 보니 그냥 성질이 난 곰인 듯하네요. 생각해 보니 사귀를 물리치고 복을 준다는 대단한 존재가 인간 밥상머리 들어주며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겠어요. 상 한 번 들어주기 전에 사자후 100번은 날렸을 것 같은 저 맹랑함이 오히려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뒤 줄임)

 

 

<다이닝>

백자 주전자 (p.106-107)

저는 이 친구가 그렇게 예쁘더라고요. 볼드한 일체형 손잡이부터 둥근 몸체, 귀여운 뚜껑 꽁다리까지…. 금방이라도 호박 마차가 되어 튀어오를 것 같아요! 원형 몸체는 전체적으로 봉긋 솟아오른 듯 아래로 갈수록 둘레가 작아지며 자칫 묵직해질 뻔한 무게감과 시각적 지루함을 덜었습니다. (뒤 줄임)

 

 

<데스크>

청자 원숭이 모양 문방구 (p.124-125)

만일 글공부가 서툰 이에게 선물로 줄 문방구를 고른다면 전 이 묵호를 고르겠어요. 원숭이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주인을 올려 보고 있으니, 아무리 글씨를 망쳐도 기죽지 않을 것 같거든요. 무거워 보이는 묵호를 들고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영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의 도비를 생각나게 합니다. “원숭이는 행복한 집 요정이에요!” 아아, 불쌍하고 귀여운 청자 원숭이. 이를 내보이며 웃는 모습이 주인의 글솜씨를 칭찬하며 아부하는 듯도 하고, 너무 무거운 나머지 망연자실 짓고 있는 헛웃음 같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이 원숭이를 애완용으로 길렀다고 하니, 그들에게 특히 사랑받았겠어요. 마당 가득 원숭이를 키우던 애호가의 책상에 놓여 있었을 듯합니다. … (뒤 줄임)

 

 

<패션>

호건 (p.162-163)

살면서 우리는 참 많은 호랑이를 만납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부터, 어린 오누이를 위협하던 호랑이, 팥죽을 좋아하는 호랑이까지. 이제는 그 기억에 이 귀여운 아이템도 한자리 차지할게요. 5~6살 이하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씌우던 복건*의 일종으로, 호랑이 얼굴이 담겨있습니다.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라고 불릴 만큼 그 어디보다도 호랑이가 많았던 곳이라 그들로 인해 줄초상을 치르는 일도 허다했어요. 산골은 물론이고, 사대문 안에도 호랑이가 나타났을 정도니까요. 그런데도 호랑이가 마냥 미운 존재는 아니었나 봅니다. 이렇게 꾸준히 사랑스럽고 재치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아이의 머리를 앙 문 모습으로 나타나, 아이가 용맹하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데에 힘을 보태고 있는 저 호랑이를 보세요. … (뒤 줄임)

*복건: 천으로 만든 두건으로 미혼 남성들이 주로 착용하였다.

 

 

어떤가? 유물의 생명력이 페이지를 뚫고 나올 것 같지 않은가? 도록이나 역사책에서 딱딱하게만 설명된 유물을 보고 막연히 거리감을 느꼈던 독자라면, 책장을 덮을 때쯤 옛 물건이 건네는 다정한 인사에 자연스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샘솟을 것이다. 깔끔한 ‘좌유물 우설명’의 구성을 백분 활용해, 일력을 넘기듯 하루하루 책장을 넘기며 ‘1일 1유물’을 감상하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다 곁에 늘 두고 싶은 나만의 ‘반려유물’을 찾는다면 글쎄,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오늘의 사랑스런 옛 물건 – 낙랑시대 상다리부터 대한제국 베이킹 몰드까지, 유물을 만끽하는 새로운 감상법》, 이감각(이해인ㆍ이희승), 책밥, 값 14,000원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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