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강 따라 걷기’는 나에게 첫사랑

2021.05.20 12:36:41

평창강 따라 걷기 제3구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자> 2021년 3월 25일 (목) 오후 1:50 ~ 5:50

<참가자> 이상훈, 이규석, 우명길, 원영환, 최돈형

<답사기 작성 날자> 2021년 3월 31일 (수)

 

오늘 걸을 평창강 제3구간은 대화면 상안미리에 있는 금당계곡 비석에서 출발하여 방림면사무소에 이르는 10.3킬로미터 거리이다.

 

 

이틀 전에 나는 대학교 동창인 최돈형(호가 가양-可洋이므로 이하 그렇게 호칭함)으로부터 제3구간을 같이 걷고 싶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가양은 한국교원대 환경교육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한 뒤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석주는 어제 서울에서 내려와서 봉평 우리 집에서 잤다. 석주와 나는 각시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낮 11시 30분에 평창역으로 가양을 마중 나갔다. 가양은 슬기말틀(스마트폰)에 연결할 수 있는 셀카봉을 가져왔다. 시인마뇽은 군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장평터미날에 12시 10분에 도착했다.

 

우리는 추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2구간 종점이자 3구간 출발점인 금당계곡 비석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은곡은 방림면에 있는 집에서 낡은 트럭을 운전하여 출발점으로 왔다. 오늘은 5명이 걷게 되었다. 낮 1시 50분에 출발하기 직전, 셀카봉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는데 “찰칵!”이라고 가양이 말을 하니 셔터가 열리면서 사진이 찍힌다. 처음 보니 신기했다.

 

 

평창군은 산이 많고 고도가 높은 땅이다.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 정도전은 일찍이 평창을 "문 앞의 땅이 좁아 수레 두 채를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고개(嶺) 위가 겨우 석 자 높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뒤 세월이 500년 이상 흘렀다. 세상이 크게 변하였다. 평창에 산이 많고 고도가 높다는 것은 이제는 약점이 아니고 장점이 되었다. 평창군은 1998년에 ‘Happy 700’이라는 로고를 개발하였는데, 해발 700m 지점이 사람의 몸에 가장 적합하고 따라서 행복한 고도라는 의미이다. 평창군 면적의 60%가 해발 700m를 넘는다.

 

빌딩이 많고 차와 사람이 복작대는 대도시에서 사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도시 생활에 지친 서울 사람들은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평창의 산이나 계곡을 찾아와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한다. 2000년대 초에 불기 시작한 펜션 열풍은 평창강의 상류에 있는 흥정 계곡이 진원지다.

 

그런데 펜션은 법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각종 통계에서는 ‘농어촌민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영어로 ‘pension’은 연금이라는 뜻이고 끝에 e를 붙여서 ‘pensione’이라고 표기해야 우리가 알고 있는 펜션이 된다. 평창군 귀농귀촌협의회 이천기 회장님께 전화로 물어보니 전국에서 가장 펜션이 많은 면이 봉평면이란다. 요즘에는 펜션 사업이 잘 안 되는데, 흥정계곡에는 아직도 98개의 펜션이 있다고 한다.

 

1975년에 개통된 영동고속도로는 평창군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평창군에는 영동고속도로 진출입로(IC)가 면온, 평창, 속사, 진부, 대관령 등 무려 5개가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강릉-서울 구간 KTX 노선이 개통되었다. 평창군에는 KTX역이 평창역과 진부역, 두 개나 있다. 기차를 타면 서울역에서 평창역까지 1시간 40분 걸린다. 청량리역에서 평창역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린다. 평창군은 이제 서울에서 먼 산골짜기가 아니라 광주나 대구보다 더 가까운 관광휴양지가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2008~2012)의 국정을 대표하는 구호는 저탄소 녹색성장이었다. 2009년 5월 13일 권혁승 평창군수는 ‘저탄소 녹색성장으로 아시아의 알프스 조성을 위하여’ 평창을 대한민국의 ‘산림 수도’로 선포하였다.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1년 지난 2019년 2월 평창군에서는 전 세계에 평창 올림픽의 평화 정신을 전파하기 위하여 매년 평창평화포럼 행사를 하기로 하였다.

 

또한 평창동계올림픽의 평화 유산을 공유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왕기 평창군수는 2019년 4월 29일 대관령 발왕산 정상에서 평창군을 ‘평화 도시’라고 선포하였다. 민선 8기 시장인 한왕기 군수는 군정 구호로서 ‘평화의 시작, 새로운 평창’을 정했다. 평창은 우리나라의 산림 수도이면서 세계적으로는 평화 도시라고 하니, 평창군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아뿔싸,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우리는 424번 지방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비닐하우스 5개가 나란히 있는 갈림길에서 둑길로 접어들었다. 지방도로는 포장이 되어서 차량은 편하겠지만 아무래도 걷기에는 불편하다. 한적한 둑길을 가다 보니 강가에 갈대밭이 나타났다. 갈대는 하천가나 습지에서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인데, 색깔은 옅은 갈색이다. 갈대와 비슷한 풀로서 억새가 있는데 어떤 땅에서도 억척같이 잘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억새는 주로 산에서 자라며 꽃은 하얀색이다. 산에는 억새, 물가에는 갈대라고 생각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갈대밭을 지나자마자 강물 위로 백로가 떼지어 날아간다.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을 찍었다.

 

 

 

둑길을 조금 가다가 다시 424번 도로로 돌아왔다. 곧이어서 선애교(船崖橋)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선애교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선애마을이다. 선애교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에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만 했다. 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듯 한다고 해서 ‘배두둑’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마을의 생김새가 배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배언덕골’ 또는 선애동(船崖洞)이라고 한다.

 

선애교 들머리 안내판에는 ‘배두둑호박넝쿨마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답사 뒤에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마을 입구에는 호박모양의 커다란 조형물이 서 있다. 사진을 찍어왔다. 아마도 선애마을에서는 호박을 주제로 뭔가 거창한 사업을 하는가 보다.

 

 

선애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대화면 상안미리다. 금당계곡이 끝나면서 앞에 널따란 뜰이 펼쳐지는데, 이 들판의 이름이 안미다. 안미 들판에는 비닐하우스가 많이 보이지만 아직도 논이 있다. 작년 가을에 벼를 벤 흔적이 남아 있다. 안미는 원래 지형이 기러기 꼬리 모양과 유사하다고 해서 안미(雁尾)라고 불렀는데, 농사짓기에 좋고 쌀맛이 좋아 안미(安味)로 바뀌었다. 안미를 둘로 나누어 위쪽이 상안미리, 아래쪽을 하안미리라고 부른다.

 

선애교를 지나서 강의 오른쪽에 나 있는 둑길을 걸었다. 우리는 평창강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둑길은 간혹 흙길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둑길의 폭은 차가 한 대 통과할 정도는 된다. 나는 오늘의 답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이 길을 차로 한번 다녀간 적이 있다.

 

둑길 왼편으로 벚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았다. 벚꽃이 피면 멋진 산책길이 될 것이다. 서울에는 요즘 벚꽃이 활짝 피었다고 하지만 여기에 벚꽃이 피려면 3주는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여기 벚나무에는 지금 한창 물이 오르고 있을 것이다.

 

둑길을 걷다 보니 강의 왼쪽에 대궐처럼 생긴 큰 기와집이 보인다. 전에 한번 가 본 적이 있다. 영화 ‘남한산성’의 세트장이다. 세트장을 왜 서울에서 멀리 있는 이곳에 세웠을까? 이곳에는 높은 건물도 없고 전신주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담 너머로는 먼산이 잘 보인다. 영화 남한산성의 감독은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보고 세트장을 결정했을 것이다. 영화감독은 대학교수보다 훨씬 더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대화(大和) 땅을 걷고 있다. 대화면은 지금은 봉평면보다 인구가 적지만 조선 시대에는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봉평보다 훨씬 번창했다. 대화장은 전국의 15개 큰 장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는 봉평장에서 별 재미를 못 보고 장을 걷으면서 허생원과 조선달이 다음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 걷을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붓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렷다.”

 

둑길을 따라 계속 걷자 길은 작은 언덕 위로 이어진다. 우리는 경사진 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우리들의 대화는 특별히 주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은곡은 손말틀(휴대폰)으로 판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걸망 하나 짊어지고 사뿐사뿐 걷는다. “누가 부른 소리냐”고 내가 물어보니 동초 김연수의 유일한 제자 오정숙 명창이 부른 춘향가라고 한다.

 

기온은 16도로 완연한 봄 날씨이다. 아직 나무에 꽃은 피지 않았지만,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은곡은 평창에서 36년이나 살았어도 오늘 걷는 길은 처음이라면서 매우 좋아한다. 처음 걷는 길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다. 처음 걷는 길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걷는 길은 설렘이 앞선다. 그리고 추억이 남는다. 마치 첫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평창강 따라 걷기’는 나에게 첫사랑이다.

 

언덕길의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 내려가는데 왼쪽에 비석이 하나 보인다. 궁금해서 가까이 가 보니 한 의인(義人)을 기리는 추모비이다. 추모비의 내용은 답사 뒤에 읽어보기로 하고 사진만을 찍어왔다.

 

 

사진을 보고는 추모비의 글씨를 판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답사가 끝난 다음 날 오전에 차를 운전하여 다시 이곳에 와서 글씨를 적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지나가던 차가 멈추더니 한 사람이 내려온다. 마스크를 썼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다. 평창포럼에서 만난 이기철 선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글씨를 베껴 쓰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는 “이 비는 내 친동생의 비석이고 무덤은 저쪽에 있다”라고 바로 앞산의 작은 무덤을 가리킨다. 1974년 당시 동생은 24살이었다. 학생들을 태우고 앞에 있는 강을 건너던 나룻배가 급류에 뒤집히고 학생들이 휩쓸렸다. 동생은 물에 뛰어들어 학생들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고 한다. 사고가 난 뒤에 그 자리에 다리를 놓았단다. 암산해 보니 그 동생은 나하고 동갑이었다. 살아있으면 내 나이다. 나는 숙연해졌다. 추모비가 있는 곳에서 이기철 선생을 만난 것은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자세히 나룻배 사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평창군 지명지> 335~336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안미천(필자 주: 안미를 흐르는 평창강을 지역 주민들은 안미천이라고 부르는가 보다)의 너비는 120m다. 1974년 8월 23일 갑작스러운 집중폭우가 쏟아져 순식간에 수심이 높아져 홍수가 났다.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안미초등학교 학생 20명과 민간인 2명을 태우고 안미천을 건너던 나룻배가 뒤집혀 9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강의 양쪽에서 로프를 걸어놓고 로프를 잡아당겨 건너는 방법으로 배를 이용하였다. 이때 사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배를 젓다가 로프를 놓치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고 말았다. 이때 논일을 하던 이순철(李順喆)이 학생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생사를 무릅쓰고 강에 뛰어들어 학생 7명을 구하고 다시 구조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희생되었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언덕길을 내려가 다시 강가로 난 길을 따라갔다. 왼쪽에 미날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나타난다. 이기철 선생이 말했던 다리가 이 미날교이다.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 미날마을이다. 이 마을은 장미산의 제일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미나리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마을 뒤로 중대갈봉 자락이 드리워져 있어 뫼 안에 있다 하여 ‘뫼내’라고 부르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미내, 미날로 불렀다고 한다.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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