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소년 이효석이 걸었던 길을 걷다

2021.05.27 10:24:57

평창강 따라 걷기 제3구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미날교를 건너지 않고 계속해서 둑길로 직진했다. 벚나무는 둑의 왼쪽에 줄지어 심어있다. 평창강은 조금 흐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강둑의 오른쪽에는 집들이 이어져 있는데, 특히 마지막 집은 매우 특이했다. 돌로 식탁과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물레방아도 보이고 커다랗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정원수에는 까만 비닐 같은 것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비닐이 아니고 크리스마스 때에 장식하는 작은 전구를 연결한 줄들이 걸려 있었다. 밤에 전구를 켜면 멋있겠다.

 

은곡이 앞장서서 들어가 주인장과 수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우리더러 들어오란다. 시계를 보니 3시 10분. 걷기 시작한 지 90분 정도 지났으니 여기서 쉬어도 좋겠다. 주인장은 이곳 출신으로서 서울 광화문에서 세척제 사업을 한다고 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만 와서 지내는 별장 같은 집이다. 텃세 같은 것은 없느냐고 물어보니, 이 마을 이장도 초등학교 동창이고 친척도 여기 살고... 전혀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내가 가져온 군고구마를 나누어 먹었다. 은곡은 걸망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내어 먹는다. 그는 막걸리를 매우 좋아한다. 주인장은 우리에게 캔커피를 3개나 주었다. 나는 믹스커피를 타서 먹었다. 나는 주인장에게 칡즙을 주면서 개수리 봉황마을에 사는 오종근 선생이 만든 칡즙이라고 말했더니, 뜻밖에도 주인장은 오 선생을 잘 안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지 세상은 매우 좁다. 나쁜 짓 하면 금방 소문나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20분 정도 쉰 뒤 3시 30분에 다시 출발했다. 우리가 쉰 집 앞까지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이제는 한적한 흙길이 나타난다. 오른쪽 멀리에 ‘안미 송어양식장’이 보인다. 수차가 돌면서 물속에 산소를 불어 넣는 모습이 하얗게 보인다. 둑길 따라 200m쯤 가다가 길이 막혔다.

 

나는 이 길의 끝이 막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미리 답사하면서 여기까지 왔었다. 끝에서 약 50m 정도만 수로를 따라 건너면 저쪽 편에서 다시 길로 연결된다. 그런데 수로가 군데군데 깨어지고 마른 덤불이 무성해서 위험해 보였다. 평창강 따라 걷기를 계획하면서 나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강에 가까운 길로 걷는다는 것. 둘째는 차가 많이 다니는 국도는 피한다는 것.

 

위험해 보이는 수로를 피하고 차가 많은 국도를 피하는 조건으로 코스를 조사해 보니, 평창강을 두 번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한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동이처럼 말이다. 강물은 깊지 않았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여울져서 흐르는 구간은 특히 얕을 것이다. 맨발로 강물을 건너는 체험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제 석주와 3구간 코스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석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강물을 건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석주는 “요즘에는 나 자신을 못 믿겠다. 때때로 손발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나도 공감이 간다. 나이가 들어가니 때때로 당황스러운 일들이 나타난다.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잘 넘어지고, 말이 헛나오고, 음식을 잘 흘리고, 안경을 어디다 벗어 놓았는지 생각이 안 나고, 등등 노화에 따르는 현상들이 나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니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어떻게 되나? 그러므로 석주의 의견은 강을 건너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석주의 의견을 존중하여 강을 건너는 것은 포기하고 대신 수로를 건너자고 결심을 하였다.

 

나는 일행에게 내 생각을 간단히 설명하고, 수로를 건너자고 말했다. 나는 ROTC 10기 포병 장교로 전방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지도자는 솔선수범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앞장서서 덤불을 헤치고 수로로 내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수로는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조심조심 수로를 건넜다.

 

 

무사히 수로를 건너자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났다. 강은 여전히 소리를 내면서 길 왼쪽으로 흐른다. 강에서 물소리가 난다는 것은 강이 여울져서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닥이 경사졌을 때 물소리가 난다. 아래쪽에 둑을 막아 물을 가두면 수위가 높아지고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 소(沼)가 있는 구간에서도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이제 우리는 방림면 방림4리를 걷는다. 방림(芳林)은 원래 대화면에 속했는데 1934년에 방림리, 운교리, 계촌리를 합해서 방림면을 만들었다. 방림이라는 말은 마을 앞산이 아름다워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방(方)씨 성을 가진 도인이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지어준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평창군 지명지》에는 다른 설명이 나온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운교에서부터 대화까지 숲이 우거져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숲과 꽃이 많아 꽃다울 방(芳) 수풀 림(林)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한다.

 

둑길을 조금 걸으니 평창강이 대화천과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대화천은 길이가 20km인데 유역면적이 크지 않아서인지 물이 아주 적게 흘러들었다. 하천의 길이가 길수록 물그릇이 커지고, 따라서 흐르는 물이 많아진다. 규모가 큰 하천을 강이라고 부르며 규모가 작은 하천을 시내라고 부른다.

 

강과 관련된 법으로는 1961년에 제정된 하천법이 있다. 하천법에서는 하천을 “지표면에 내린 빗물 등이 모여 흐르는 물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천을 국가하천과 지방하천으로 나눈다. 국가하천은 국토해양부에서 관리하고 지방하천은 관할 구역의 시ㆍ도지사가 관리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평창강은 지방하천이다.

 

대화천 합류 지점을 조금 지나자 왼쪽에 구포교가 나타난다. 구포교를 건너면 31번 국도로 연결된다. 구포교를 건너가 다리 사진을 찍었다.

 

 

구포교를 지나 31번 도로로 오른쪽으로 돌자마자 커다란 돌비석이 보인다.

 

 

구두미는 마을 이름인데 구포(龜浦)라고도 한다. 거북이가 진흙에 빠지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의 형국이어서 구포라고 한다. 달머리는 달의 머리 곧 월두동(月頭洞)을 말하는데, 구두미 동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구름에 가린 반달 형국인 운중반월형(雲中半月形)이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구포교를 건너가면 달머리 마을과 구두미 마을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구포교 입구에 커다란 돌비석을 세웠다고 생각된다.

 

방림4리 일대는 2006년 7월 대홍수 때에 완전히 침수되었다. 2006년 장마 기간에 평창 지역에는 무려 1,200mm의 비가 내려서 100년 주기로 일어나는 큰 홍수가 발생했다. 평창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대부분이 파괴되고 강변 마을이 모두 침수되었다. 평창군의 군화(郡花)는 철쭉이다. 금당계곡 가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아름다웠는데, 강가의 철쭉과 버드나무들이 모두 급류에 휩쓸렸다. 당시 평창군에서만 8,000억 원의 홍수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2006년 7월 홍수 때에 구포교가 잠겨있는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홍수 사진을 찍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에서 필자가 찍은 사진을 함께 올린다.

 


 

 

지금까지 강가 길을 한가하게 걷다가 31번 국도로 나오니 갑자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평일인데도 웬 차가 그렇게 많이 다니는지... 거의 10초에 한대 꼴로 차가 쌩쌩 지나간다. 시끄러운 국도가 너무도 싫어서 나는 맨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일행과 멀리 떨어져서 약 1km쯤 걷자 오른쪽에 조용한 길이 나타났다. 다행이었다. 조용한 길로 들어서니 그제야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갈림길에 효석문학100리길 표시판이 보인다.

 

 

방금 걸었던 시끄러운 길은 이효석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이효석은 1907년생이니 1914년쯤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을 것이다. 그는 방학이 되면 이 길을 따라 봉평에서 평창읍까지 걸었을 것이다. 100리 길을 가는데 아들을 혼자 보내는 부모는 없었을 터이고, 아마도 이효석은 아버지와 함께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거의 100년 전에 소년 이효석이 걸었던 길을 방금 내가 걸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느껴졌다.

 

나는 2015년에 봉평에 귀촌하여 살고 있어서 이효석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봉평’이라고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떠올린다. 봉평에는 효석이라는 이름이 곳곳에 들어있으며, 효석이라는 이름을 내건 대회와 행사가 많다. 내가 아는 것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효석문학관, 이효석문학상, 이효석문화재단, 효석문화제, 이효석문학숲, 효석문학100리길, 효석달빛언덕, 효석사생대회, 이효석작품독후감대회, 효석휘호대회, 효석백일장, 이효석생가, 문학산 이상 모두 13개나 된다. 죽은 이효석이 살아 있는 봉평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효석 이름으로 몇 개는 더 나오지 않을까?

 

이효석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남기고 1942년에 평양에서 35살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부인 이경원 여사는 그보다 2년 전에 먼저 죽었다. 진부면장을 지낸 이효석의 아버지가 고아가 된 손자들을 평창으로 데려와서 길렀다. 장녀 이나미 여사가 아버지의 유업을 발굴하고 빛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장녀 이나미 여사는 1982년 사재를 털어 이효석기념사업회와 이효석문학연구회를 창립하고 나라 안팎에 있던 부친의 작품들을 모아서 《이효석전집》(전8권)을 펴냈다. 이나미 여사는 1999년에 자전적 수필 《마지막 날의 아버지》를 통해 부모님의 짧은 생애와 1949년에 월남한 이야기, 두 동생을 강원도에서 서울로 데려와 뒷바라지한 이야기 등 아픈 가족사를 증언하였다. 이나미 여사의 부친에 대한 회고록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다. 이나미 여사는 2015년에 세상을 떴다.

 

이나미 여사의 남동생 이우현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에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위스콘신대에 입학 허가도 받았지만, 막상 비행기삯이 없었다. 그를 도운 건 아버지였다. 여비를 만들기 위하여 그는 부친의 육필 원고를 수집해서 1959년에 5권으로 출간했다. 책의 인세 400달러로 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마친 뒤에 미국에 정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러 귀국하기 전까지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은 건 누이를 빼면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우현씨는 65살에 은퇴한 뒤 귀국하여 이효석문학상을 후원하는 일을 하였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부친의 책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고, 《메밀꽃 필 무렵》을 영어로 번역해 2004년에 책을 내기도 했다. 이우현씨는 2012년에 이효석문학재단을 설립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다.

 

이효석의 무덤은 평창군 진부면 논골에 있었는데, 영동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1973년에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하였다. 그러다가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1998년에 장녀 이나미 여사가 파주 동화경모공원으로 무덤을 이장하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이때 이나미 여사와 봉평면 관계자 사이에 불화가 있었나 보다. 이나미 여사는 이효석의 무덤을 봉평으로 이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봉평면에서는 이효석문학관 바로 위 양지바른 언덕에 이효석 무덤 예정지를 마련해 놓고서 후손들과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이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기원한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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