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안순과 함께 간의대를 설치하다

2021.12.23 11:02:00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3] 이천(李蓚) - ③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조에 무인 출신으로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후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간의대 설치 이전인 세종 18년(1436)에는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상언하기를, "대완구(大碗口)가 너무 무거워서 싣고 부리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中碗口)가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게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小碗口)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게 다시 만든다면 말에 싣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신이 본도에서 감독해서 만들려 하오나 도내에서 철물이 없사오니, 청하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두 개만 만들어 보내 주소서." 하니, 즉시 공장(工匠)을 평양에 보내어 이를 만들게 하였다. (《세종실록》19/7/27)

 

그는 무장일 때도 동시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는 화포 개발에 앞장섰다. 1437년 그가 제작한 대포가 위력을 발휘하여 야인을 크게 파하자 세종은 이천을 정헌호조판서(正憲戶曹判書)로 승진시켰다. 이때가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간의대 설치

 

수많은 천문기기가 만들어지자 세종은 기기들을 설치하기 위한 간의대를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우도록 한다. 이천은 당시 호조판서인 안순(安純)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건설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의대란 한마디로 천문관측을 위한 천문대다.

 

 

간의대는 높이가 9미터, 길이가 14미터, 넓이가 9.8미터인 현대식 천문대로 모두 돌로 쌓았고 이 천문대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연경에 세운 관성대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간의대 중앙에 주망원경 격인 간의를 설치하고 간의의 남쪽에 간의의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을 장치했다. 간의대가 건설되자 각종 최첨단 천문관측기기들이 속속 들어섰다.

 

간의대의 서쪽에는 규표(圭表)를 설치했는데 규표는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떠 있는 하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짧고, 멀리 남쪽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동지 때 가장 긴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표준달력이다. 음력은 달이 12번 차고지는 것을 1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음력 1년은 354일이므로 태양력인 365일과는 큰 차이를 보여 계절과 맞지 않아 농사짓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기원전 24세기 요(堯)나라 때부터 제기된 것으로 해를 관찰해서 24절기를 적용한 태음태양력이 개발되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규표이다.

 

세종의 학자들은 13세기 원나라 때 만든 규표를 기본으로 삼아 청동을 높이 8.28미터의 막대[表]를 세우고 땅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도록 청석을 다듬어 길이가 26.8미터인 받침[圭]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의 규표에 견줘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정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규면에는 장, 척, 춘, 푼, 단위의 눈금을 새겨 청동막대의 그림자 길이로 1년의 길이(365.2425)와 24절기를 재었는데 푼[分]은 현재의 척도로 2밀리미터이다.

 

조선 왕조의 왕립천문대라 볼 수 있는 간의대는 세종 19년(1437) 4월 15일 공식적으로 완결된다. 간의대 서쪽에 작은 집을 지어 혼천의와 혼상을 설치했다. 연못의 남쪽에는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동쪽으로는 임금의 시계인 흠경각루(옥루)가 세워졌으며 매일 밤마다 서운관원(書雲觀員) 5명이 입직하여 천문관측에 종사했다. 이와 같은 천문 관측대와 기기들은 15세기 전 세계를 통틀어 그 규모와 정밀함에서 으뜸 수준이었다.

 

간의대 설립으로 조선 왕조는 자주적인 역법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세종 24년(1442)에 완성된 이순지 등의 《칠정산내편》은 조선에서 관측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의 역법으로 간의대와 같은 천문대와 천문의기들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작이다.

 

사직 간청

 

세종은 이천의 은퇴 요청에도 그의 재질을 아껴 1443년에는 군사병기를 관장하는 군기감의 제조(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군기감으로 각종 칼, 창 등 소형무기류로부터 화포, 병선에 이르는 군사무기들을 개발하면서 특히 표준화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세종 20년(1438) 이천은 세종에게 은퇴를 상언했다.

 

“신의 어미가 86살로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으로 신이 오랫동안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에 노모를 그리는 정을 잊기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노모의 여생을 봉양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종실록》 20/12/25)

 

환도와 창 개량

 

이후 당시에 환도(還刀)는 칼날이 곧고 짧은 것이 급할 때 쓰기가 편리한데 당시 생산되는 환도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건의가 있자 이천은 가장 적합한 환도의 길이와 너비를 연구했다. 그는 1척7촌3분과 너비 7푼짜리 및 길이 1척6촌 및 너비 7푼의 환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도출하여 생산하게 했고 창의 길이도 연구하여 생산했다.

 

공격 무기뿐만 아니라 방패처럼 수비용 무기에도 관심을 보여 방패의 길이와 넓이를 확정하여 공격과 수비에 편하도록 개량하는 등 가장 적절한 무기의 표준화에 공을 들였다.

 

특히 이천은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야포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뒤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 : 무쇠)로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구리 대신에 쇠로 된 대포를 만들었다. 연구하는 이천이었다.

 

(군기감 제조 이천이 무쇠로 화포 만드는 기술을 야인들에게 배울 것을 건의하다) 군기감 제조 이천(李蕆)이 아뢰기를, " 동랍(銅鑞)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아니하옵기로 무쇠[水鐵]로서 화포를 주조하려고 시험하여, 신이 심력을 다하여 계획하여 보았사오니, 무쇠의 성질이 강하면서 굳지 못하므로 불리기[鍊鑄]가 용이하지 아니합니다. 신이 들으매, 북방의 야인(野人)들이 무쇠 농기(農器)로써 연철(軟鐵)이 되게 해서 군기(軍器)를 만드는 자가 많다 하는데, 마땅히 우리나라에 오는 야인에게 물어 보게 하시고, 경성(慶城) 사람으로 야인에게서 배운 자도 많사오니, 마땅히 재주 좋은 자를 역말[驛馬]로 불러다가 배워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나이다." 하니, 예조에 명을 내렸다. (《세종실록》 26/11/1)

 

1445년 3월 수군들을 이끌고 한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이천 등이 3군을 거느리는데 함선마다 사졸 30여 명씩 승선하고 다른 배 4척에 허수아비를 태워 적군으로 삼아 20보쯤 떨어진 거리에서 주화포와 질려포를 쏘면서 전투를 시연했다. 이천은 단지 병기나 의기 등의 제작 책임자에 머물지 않고 장수로도 큰 활약을 한 전천후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이천은 세종의 만류로 관직에 계속 머물면서 화포의 제조에 남은 생을 전념하던 중 어머니의 상(喪)을 당했으나 이때 세종이 승하하여 세종의 능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한다. 이후 이천은 문종 원년(1451)에도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문종도 이천의 청을 거절하고 판중추원사에 임명한 후 궤장(지팡이)을 하사했다. 그러나 궤장을 하사받은 지 얼마 안 된 1451년 11월에 76살로 세상을 떴다.

 

《문종실록》의 졸기(卒記, 사후 인물 기록)에는 “시호(諡號)를 익양(翼襄)이라 하니, 천성이 정교하여 화포(火砲)ㆍ종경(鍾磬)ㆍ규표(圭表)ㆍ간의(簡儀)ㆍ혼의(渾儀)ㆍ주자(鑄字) 따위를 모두 그가 감독하고 관장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구의 토벌과 북쪽 오랑캐의 정벌, 인쇄술의 향상과 도량형의 표준화, 천문의기 제작 등 무인과 과학자로서 화려한 생을 펼쳤던 이천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으뜸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 과학자요 기술자로 볼 수 있다.

 

‘기술자 장군’이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는 1977년 이천의 시호를 따라 익양관(翼襄館)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이천호로 명명했다. (참고 : 이종호,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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