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마을과 ‘떼돈 벌었다’라는 말의 유래

2022.02.26 12:05:54

평창강 따라 걷기 10-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88번 도로를 따라 2km 정도 걷다가 오른쪽으로 나있는 ‘한반도로(路)’로 접어들었다. 이 도로는 한반도지형이 유명해지면서 포장도 새로 하고 가로수로서 무궁화를 심은 것 같다. 한적한 도로 양쪽으로 무궁화가 한창 피어있다. 무궁화는 아욱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무궁화의 꽃색은 은은하다. 다섯 조각 꽃잎의 안쪽에는 진하게 붉은 부분이 조금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연분홍 꽃잎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꽃 한 송이는 열흘을 못가겠지만 꽃이 지면 다른 꽃이 계속해서 피어나기 때문에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무궁화는 약 100일 동안 계속해서 핀다고 한다. 요즘에는 여러 가지 개량종 무궁화가 나타나 꽃색도 다양하고 홑꽃 외에도 겹꽃, 반겹꽃 등 변종이 많다.


 

 

꽃을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무궁화꽃은 질 때도 아름답다. 무궁화와 장미의 떨어진 꽃잎을 본 적이 있는가? 장미나무 아래에는 꽃잎이 마르고 퇴색하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매우 보기 흉했다. 그러나 무궁화 나무 아래에는 꽃송이가 꽃피기 전 모습으로 다시 곱게 오무라져서 아름답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땅에 떨어진 무궁화 꽃을 보고서 한눈에 반하였다. 무궁화 외에도 떨어진 꽃이 아름다운 것으로는 능소화와 동백꽃이 있다.

 

내가 근무했던 수원대 환경공학과에는 여학생이 1/4 정도 차지한다. 공과대학의 다른 학과에 견줘 여학생이 많아 다른 교수들은 우리 학과 교수들을 부러워했다. 여학생들을 오래 대하다보니 학년별로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학년 신입생은 아직 여고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모습들이다. 2학년은 이제 슬며시 멋을 부리기 시작한다. 3학년은 화장도 잘하고 원숙한 모습들이다. 4학년은 대4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취직 걱정 하느라고 어두운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대학생 때는 인생의 황금 시절이어서 여학생들은 다 예쁘다. 그렇지만 굳이 비교해 보라면 2학년이 가장 아름답다. 꽃으로 비유하면 1학년은 피어나는 꽃이고, 2학년은 방금 핀 꽃이고, 3학년은 피어있는 꽃이고, 4학년은 조금 전에 피었던 꽃이다.

 

 

한반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한반도교가 나타난다. 한반도로는 2009년에 확ㆍ포장 공사를 했다고 길가 표시석에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지형이 유명해지면서 도로를 개량했나보다.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평창강 물이 거센 탁류다. 평창강 상류에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불었다. 이 정도로 물이 많으면 뗏목을 탈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현장에서 결정할 일이다.


 

 

 

한반도교를 지나 조금 걸으니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나타난다. 길 들머리에 한반도 뗏목마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다. 작은 길을 따라 700m쯤 걸으니 평창강이 나타난다. 커다란 주차장 입구에 영월군 관광안내도를 세워 놓았는데, 이것도 한반도 모양이다.

 

 

 

우리는 한반도뗏목마을에 오후 1시 40분에 도착했다. 식당을 출발한 후 1시간 10분을 걸었다. 우리는 뗏목마을에 있는 휴게소에서 부라보콘을 하나씩 사 먹었다.

 

뗏목마을의 정식 이름은 선암마을이다. 선암마을은 행정구역상 한반도면 옹정리이다. 옹정리(擁亭里)라는 이름은 1914년 시행한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옹산리(擁山里)의 옹자와 사정리(射亭里)의 정자를 따서 옹정리라고 하였다. 마을 앞에는 평창강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도덕산(높이 528m)이 있다. 1995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61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구가 계속 줄어서 10가구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선암마을 건너편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는 옛날 신선이 이곳 경치에 반하여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선암(仙岩)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마을 이름도 선암마을이 되었다. 카카오맵에는 ‘한반도뗏목마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마을 앞 평창강 건너편에 있는 반도 모양의 지형이 유명한 한반도지형이다. 동해안에 해당하는 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서해안 쪽은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동고서저(東高西底)의 지형이다. 수심도 동해안 쪽은 4m로 깊고 서해안쪽은 2m로 낮다고 한다.

 

 

한반도지형은 문화재청에 의해 2011년에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이후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선암마을에는 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선암마을에서 섶다리를 거쳐 한반도지형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섶다리는 없어졌다. 지금은 2009년부터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관광용 뗏목이 2대 있다.

 

이날 평창강 수위는 평소보다 높았지만, 뗏목을 운항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뗏목을 타는 체험을 하였다. 우리가 탄 뗏목에는 사공이 2명 있는데, 각각 앞사공, 뒷사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사공은 긴 삿대를 이용하여 얕은 곳을 피하고 뗏목이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방향을 조절한다.

 

뒷사공은 노를 저어 뗏목을 앞으로 나가게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터를 달았기 때문에 강물을 따라 내려갈 때 동력 없이 물살을 따라 내려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는 모터를 이용한다. 사공 한 사람이 투박한 강원도 말투로 뗏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풀어낸다. 스피커에서는 경기명창 김영임의 아리랑 가락과 강원도 민요가 흘러나오고.

 

조선 시대 한강에서는 태백산맥을 낀 인제 지역의 목재는 북한강으로, 오대산을 낀 평창과 동강 유역인 영월 정선의 목재는 남한강으로 운반하였다. 목재는 건축용 금강송이 대부분이나 화목용도 있었다. 벌목하는 인부를 산판꾼이라고 불렀다. 음력 10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의 겨울에 나무를 벤다. 겨울에는 산에 눈이 쌓여 하산작업에 유리하고 해빙기에 물이 불어나 똇목을 띄우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똇목으로 만드는 나무 길이는 6m, 지름은 15cm 이상 되어야 한다.

 

뗏목을 타고 정선 아우라지에서 천리 길인 서울 마포까지 가는 데는 10~15일이 걸렸다. 사공들은 뗏목 위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해가 지면 뗏목을 버레(강가의 돌무지)에 매어두고 주막에서 묵었다. 뗏목이 떠날 때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여성은 뗏목 부근에 접근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뗏목 사공들이 받는 품삯을 고전(雇錢)이라고 했다. 동강 유역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쌀 두 말을 못 먹고 죽었다고 할 정도로 쌀이 귀하고 가난했던 그 시절이었다. 뗏목을 운반하고 서울까지 한번 다녀와 받는 돈은 쌀 다섯 가마를 살 만큼 큰돈이었으며 그 당시 군수의 한 달 봉록보다도 많은 액수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떼돈 벌었다”라는 표현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공은 뗏목을 목상(木商)에게 넘기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걸어서 갔다.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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