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소녀 이건자는 유명한 소리꾼 부녀

2022.03.08 11:21:17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6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선녀와 놀량>은 전혀 관계가 없는 말처럼 보이나, 주 무대가 <산(山)>이라는 점, 선녀들의 놀음이나 소리패의 놀량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산타령을 비롯하여, 장기(將棋)타령, <배뱅이굿>, <민요 한마당>의 분위기는 관객을 흥취와 열기 속에 몰아넣었다. 다양한 종목들을 준비해서 성북구민들에게 전통음악의 미(美)적 값어치를 높여 오고 있는 이건자 명창은 어떤 소리꾼인가? 이번 주에는 그 이야기를 해 본다.

 

서울 경기의 긴소리, 또는 긴잡가로 통하는 좌창(坐唱)보다는, 주로 입창(立唱) 곧 선소리를 주 전공으로 공부해 온 소리꾼, 이건자는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속 마을인 ‘가리산리’에서 태어났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산에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자연 속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건자는 어린 시절, 다람쥐처럼 나무타기를 잘했던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어느 날, 나무 위로 뻗은 가지에 달린 호박을 따려고 올라갔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변을 당했는데, 안타깝게도 잠깐의 실수가 평생 그의 발걸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가 살던 곳이 도심만 같았어도, 급히 큰 병원으로 달려만 갔어도, 그의 발걸음은 평생 불편을 몰랐을 텐데,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건자의 아버지는 가리산리 마을에서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유명한 소리꾼이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가령, 동네에 초상이 나서 상여가 나간다든지, 또는 마을에 잔치가 벌어지지 않아요? 그럴 때면 으레 아버지가 도맡아서 소리를 했기 때문에 저는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익힐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흉내 내기가 어려웠지만, 많이 듣고 또한 자주 듣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상엿소리의 뒷소리를 받기도 했어요. 어른들이 많이 귀여워하셨지요. 아버지와 어린 저는 동네의 유명한 소리꾼 부녀로 알려져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군부대에서 쓰는 스피커를 장구 삼아 싸리나무를 두드리며 소리 연습을 하셨어요. 때로는 자식들에게도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지요. 저에게 아버지는 너무도 훌륭한 소리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소리가 듣기 좋았고, 우리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소문에 소문을 타고 이웃 동네에 초청되어 소리를 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노래 잘하는 가수로 통했어요. 친구들이 저를 보면 ‘가수가 지나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노래를 곧잘 했던 모양이에요. 스스로 생각해도 노래를 꽤 좋아하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이건자에게도 고민이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야겠는데, 10남매의 시골생활이 중학교 공부는 꿈도 못 꾸게 했기 때문이다. 설사 진학한다고 해도 좋아하는 소리는 서울의 전문 명창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이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어서 소리를 포기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중학교까지는 50리 길, 중학교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다보는 소녀 이건자의 못 배운 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적십자 단체에서도 찾아와 노래해 달라고 요청도 오고, 때로는 가수 협회와 같은 곳에서도 서울 가서 가수로 키워주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오빠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고, 노래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의 진학도, 가수의 꿈도 접고, 오로지 라디오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면서 집안일을 돕는 생활로 이럭저럭 5~6년이 흘렀다.

 

이건자가 1살이 되었을 무렵이다. 이렇게 시골에 묻혀 있다가는 가수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간다는 고심 끝에 친구를 따라 서울행을 결심하게 된다. 다행히 자동차 광약을 만드는 <캥거루 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도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평소 생활화된 ‘부지런함’이나 남을 위한 ‘친절한 배려’ 등으로 이건자의 이름은 회사 내에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에게 배운 민요창도 이 회사에서도 인기를 끌었기에, 회사 내의 회식자리나 운동회와 같은 행사가 있는 날은 이건자의 날이었다고 한다.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 직원들이나 상사들 가운데 일부는 퇴직 후에도 <까치회>라는 봉사 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하고 사회봉사를 하며 이건자와 교분을 쌓고 있다.


 

 

그들은 이건자를 ‘마음씨 곱고 착한 친구’, ‘특히 노래를 잘하던 친구’, ‘성격이 원만하여 회사 내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던 친구’ 등으로 기억하며 사회봉사를 즐겁게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친구 몇몇과 함께 유행의 첨단을 걷는 명동으로 구경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하게도 노래자랑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동료와 친구들이 이건자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즉석에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유행가도 곧잘 불렀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에게 배운 <창부타령>을 흐드러지게 불러 젖혔다고 한다. 결과는 1등, 그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제부터 시골처녀 이건자에게 소리꾼의 길은 열릴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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