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이씨, 고해의 바다를 건너 창해에 이르니

2022.04.04 13:34:49

《고행록, 사대부가 여인의 한글 자서전》, 김봉좌,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고행록(苦行錄).

이 책의 주인공, 한산 이씨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한글 자서전에 붙인 제목이다. 얼마나 인생이 고단했으면 자서전에 ‘고행록’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정경부인까지 올랐지만, 인생의 그림자와 거친 비바람에 눈물 흘린 날들도 참으로 많았다.

 

이 책 《고행록, 사대부가 여인의 한글 자서전》 지은이 김봉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근무하던 시절, 진주 유씨 모산종택을 방문해 두루마리 형태의 친필본을 직접 보았다. 당시 장서각에서는 한산 이씨 부인의 《고행록》 번역 작업이 한창이었고, 지은이는 한글문헌학 전공자로서 자료집 편찬을 주관하고 있었다.

 

 

이때 펴낸 자료집이 《고행록: 17세기 서울 사대부가 여인의 고난기》였고,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를 올올히 풀어낸 것이 이 책이다. 사실 한산 이씨는 남편의 정치적 부침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기에, 유명천의 행적과 한산 이씨의 고행록을 견준 지은이의 노고로 하나의 완결된 서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한산 이씨 부인은 아계 이산해의 고손녀로 1659년(효종10), 기해년에 태어났다. 한산 이씨 가문은 이산해와 그 아들 이경전이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칠 때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그 후손들은 이렇다 할 벼슬을 하지 못해 가문의 세력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이 집안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예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기해년에 태어나는 자손은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이 예언에 따라 기해년에 태어난 첫 번째 귀한 사람이 바로 선조 시절 영의정까지 오른 이산해였다. 그리고 한산 이씨 부인이 태어난 1659년은 이산해 탄생 이후 120년 만에 맞은 두 번째 기해년이었으니, 비록 딸이었지만 집안이 한산 이씨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 예언을 증명하듯, 그녀는 열여덟 살에 스물여섯 살 많은 유명천과 혼인하여 진주 유씨 집안의 종부가 되었고, 지아비의 품계에 따라 바로 정3품 숙부인이 되었다. 유명천은 숙종 시기 남인 정권의 핵심 인물로, 세 차례의 정치적 환국 속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비참한 몰락을 맛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가 한산 이씨와 혼인할 때는 두 번이나 부인을 잃고 슬하에 세 딸을 둔 상황이었다. 열여덟 살의 명문가 규수에게는 쉽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세가 많이 기운 상황에서 이 혼인은 하나의 돌파구가 됐다.

 

혼인 이후 남편의 관직은 탄탄대로를 달렸고, 그녀의 지위 또한 3품 숙부인에서 22살에는 2품 정부인, 33살에는 1품 정경부인에 오르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젊은 나이에 사대부가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고조부인 영의정 이산해에 견줄 만한 귀한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영광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1694년 갑술환국을 기점으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남인의 거두였던 유명천은 기나긴 유배길에 올랐다. 한산 이씨가 남편이 유배지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한 세월이 무려 10년이었다. 유명천은 10년이 흐른 뒤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오랜 타지 생활에 지쳐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녀의 또 다른 큰 슬픔은 바로 아이였다. 열여덟 살에 시집온 뒤 세 차례나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진주 유씨 가문의 종부로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막중한 상황에서, 귀하게 얻은 아이를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떠나보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p.81-82)

위중한 병을 여러 번 앓고, 이런 힘든 지경에 끝없이 애태우며 첩첩이 쌓인 서러움을 상중에 누구에게 말하리오? 마음에 쌓인 악업이 무거워 세 아이를 참혹하게 잃으니 간장이 마디마디 썩었다. 또 이로 인해 혈변을 보아 회임 소식도 감감하니 시댁 조상께 불효부가 된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가까운 친족 중에 뒤를 이을 이도 없으니 먹고 자는 것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남편의 친동생이 낳은 아들 유매(柳楳)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매의 부인으로 맞이한 며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뒤 맞이한 둘째 며느리도 혼인 3년 만에 세상을 떴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실의 고통, 게다가 후사 또한 염려해야 하는 고뇌는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고행록》은 셋째 며느리를 들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젊은 시절 잠깐 영화를 누렸으되, 《고행록》을 썼던 60살 즈음 자식 셋과 며느리 둘을 먼저 앞세운 심정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이다. 이때 쓴 한산 이씨의 고행록에는 그런 비탄이 절절히 묻어난다.

 

(p.111-112)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세상만사 다 뜬구름 같고 서산으로 지는 해와 같노라. 내 얼마나 세상에 더 살겠는가마는, 낮이면 재미없는 집안일에 골몰하다가 저녁이면 종들도 제 처소로 돌아가니 서글픈 마음이 갈수록 그지없어라. 부모형제나 돌아가신 정령들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무슨 죄벌로 60년 되도록 이토록 서럽고 괴로운가? 한탄하며 원망하노라.

 

흔히 ‘인생은 고해’라고들 하지만, 한평생 좋은 날만 누리고 사는 사람도, 나쁜 날로만 가득한 사람도 없다. 행복한 사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한 사람도 얼마만큼의 행복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생을 다소간 살아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한산 이씨도 그랬다. 명문가 규수로 태어나 혼인 이후 33살에 사대부가 여성으로 으뜸 지위에 올랐지만, 이후 30년은 끝없는 가시밭길이었다. 사람의 인생에는 누구나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 법이니, 너무 부러워할 것도, 너무 안타까워할 것도 없는 듯싶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한산 이씨의 슬픔도 마침내 끝이 났다. 세 번째로 들인 며느리 창녕 성씨가 아들 유경용을 낳고 두 딸까지 낳으며 대를 이었고, 1727년 한산 이씨 부인이 임종할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그녀의 떠나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편안했을 것이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예를 다했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고행’이라 표현할 만큼 힘들어했지만, 그 모든 고해를 건너 마침내 창해에 다다른 그녀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을 것 같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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