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그 땅에 남겨진 흔적

2022.08.15 11:47:17

《역사 탐험대, 일제의 흔적을 찾아라》, 정명섭, 노란돼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식민지(植民地).

우리가 수도 없이 부르고 배웠던, 우리가 불과 백여 년 전 처했던 현실인 ‘식민지’는 ‘사람을 심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땅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수많은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이 땅에 심었다. 그들은 이 땅에 집을 짓고, 사업을 하고,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오래도록 이 땅에 남았다.

 

그 흔적을 다룬 책 정명섭의 《역사 탐험대, 일제의 흔적을 찾아라》는 한국에 남은 일제시대 건물, 가옥, 산업시설을 ‘노인호’라는 교수와 ‘동찬’이라는 아이가 함께 답사하며 나누는 문답으로 보여준다. 자칫 무겁고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재기 넘치는 대화와 풍부한 역사적 설명이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한다.

 

 

그들은 일제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닌다. 부평 삼릉마을 줄사택 유적을 걷고, 부산 기장 광산마을을 가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고, 박노수미술관과 벽수산장도 다녀간다. 이들이 다닌 열 곳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네 곳을 정리해보았다.

 

1. 삼릉마을 줄사택 유적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인천 부평에 무기공장 조병창을 세웠다. 부평은 땅이 넓고 물자가 들어오는 인천항이 근처에 있으며, 경성과도 가까워 안성맞춤이었다. 조병창이 들어서면서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도 차례차례 들어섰다. 처음 들어온 ‘히로나카 상공’이라는 회사는 1942년 미쓰비시에 인수되었고, ‘미쓰비시’를 한자로 쓴 ‘삼릉’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히로나카 상공이 세운 노동자들의 사택, ‘줄사택’도 미쓰비시 소유가 되었다.

 

 

좁은 땅에 최대한 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줄사택’은 한 채에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집들을 길게 이어 지은 다음 화장실을 한쪽 끝에 만들어두는 형태였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나마 일본 노동자들에게만 제공되어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고 한다.

 

2. 기장 광산마을

1930년, 스미토모 광업주식회사는 광업권을 얻어 본격적인 기장 구리 광산 개발에 나선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전쟁이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기반을 만든 일제는 나라 밖 100만 명, 국내 680만 명, 모두 78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을 각종 노동에 강제 동원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3천만 명 정도였으니 4명 중 1명은 어떤 형태로든 끌려갔다는 얘기다.

 

그렇게 전쟁터나 공장,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 상당수가 비참하게 죽었다. 그리고 외국으로 끌려간 사람 가운데 약 20만 명 이상이 이런저런 이유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내에서 강제 동원된 사람 가운데서도 약 천 명 정도의 희생자가 확인되고 있다. 당시 스미토모 광업은 전략 물자를 생산하는 군사 산업체로 지정되어 필요한 노동력을 국가에 신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끌려온 조선 사람들은 하루에 12간씩 2교대로 일을 하며 착취당했고, 어쩌다 쉬는 날에는 읍내로 끌려가 군사 훈련까지 받아야 했다.

 

기장에는 이 시기 조선인 광부들이 머물던 사택이 남아있다. 광산은 지금은 폐쇄되어 접근이 어렵지만, 낡은 일본식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처음 지어졌을 때는 ‘경성감옥’으로 불렸지만, 1912년 마포 공덕동에 생긴 감옥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면서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처음 약 500평이었던 규모는 점차 확장되어 16,500평까지 늘어났고, 남녀 간수만 해도 250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30퍼센트 정도가 조선인이었다. 의병들의 서울 진공 작전으로 한동안 완공하고도 사용하지 못하다가 1908년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곧바로 이강년이나 허위 같은 의병장들은 물론, 안창호 같은 독립운동가를 잡아 가두었다.

 

(p.121)

“이건 뭐예요?”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들의 각종 정보를 적은 수형 카드들이다.”

노인호 교수의 얘기를 들은 도찬이는 벽에 붙은 카드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교수님, 이분들 눈빛이 다 살아있어요.”

“끝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아서일 거야. 이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놨다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죽지 않고 감옥에 갇힌다고 해도 배고픔과 구타, 그리고 집요한 전향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지. 거기다 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건 더더욱 고통이었단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숨을 거뒀단다.”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용변 배출구를 만들어 그곳으로 용변을 빼내는 등 혹독한 감옥생활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고통스러운 전향 공작을 끝까지 견뎌낸 독립운동가들은 참으로 대단한 이들이었다.

 

4. 박노수미술관과 벽수산장

박노수미술관은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1938년 지어준 집이다. 나라를 팔고 받은 은사금으로 거부가 된 그는 화려한 집을 짓는 몰염치한 돈 자랑을 했다. 이후 박노수라는 화가가 이 집을 사들였다가 종로구에 기증하면서 지금은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의 과시욕은 자신의 집, ‘벽수산장’을 지으며 극에 달했다. 나라를 팔아 받은 돈으로 서촌 일대의 땅을 2만 평이나 사들인 그는 거대한 서양식 주택을 지었다. 프랑스에서 설계도를 들여와 무려 10년이 넘게 걸려 지은 벽수산장은 윤덕영이 죽은 이후 일본 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덕수 병원이 들어왔고, 한국 전쟁 후에는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들어와 사무실로 쓰였다.

 

그 집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러온 악재인지, 1966년 화재로 저택은 크게 망가졌다. 그리고 몇 년 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허물어 버렸고, 그 자리에는 집들이 들어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땅에 자기네 사람들을 심으며, 일제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마음을 아프게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폭력에 희생되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이 일본에 앙금을 쉽사리 풀고 있지 못하는 이유도 그 폭력의 상처가 쉽사리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빛을 되찾은 날’, 광복절이다. 어둠에 잠겨있던 이 땅이 빛을 되찾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피와 희생, 눈물이 있었음을 응당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의 세계고, 깨어있는 국민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광복절을 맞은 오늘, 모두가 아픈 역사를 돌아보고, 되새기고, 깨어있는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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