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겪은 여자들의 생생한 증언

2022.09.26 11:26:59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박은정 뒤침, 문학동네 펴냄)》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0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전자책 보시는 분들 많으시지요? 저는 그동안 종이책을 고집하다가 최근에 전자책을 사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종이책을 넘길 때의 그 감촉, 그리고 펼친 책에 코를 박을라치면 마음을 아늑하게 해주는 종이향은 결코 전자책이 줄 수 없는 종이책만의 강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것뿐인가요? 펜을 들어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밑줄을 그을 때 펜을 통해 손가락에 전해져오는 미세한 떨림 등은 저에게 종이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즈음 어쩔 수 없는 필요성 때문에 전자책을 보기 시작하였는데, 전자책도 나름 좋더라고요. 제가 전자책을 보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지방 재판에 갈 때마다 재판기록뿐만 아니라 오가는 중에 보려고 항상 책 한두 권은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즈음 지방에 갈 때마다 아내랑 동행하면서 가방이 빵빵해졌습니다. 간식거리도 넣고 냉동실에서 꺼낸 물도 몇 병 넣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조금 큰 갤럭시탭을 사서 재판서류도 전자화하여 여기에 넣고, 책도 종이책 대신 전자책을 갤럭시탭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자책을 보기 시작하였는데,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종이책이 줄 수 없는 이점이 있더라고요. 곧 전자책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하이라이트로 색깔을 넣을 수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밑줄 친 부분만 다시 보는데, 전자책은 하이라이트 된 부분이 한곳에 다 모여있어, 페이지 넘김 없이 계속 이어가며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된 부분은 이미 전자화되어 있으니까, 그 중 더 마음에 드는 부분은 쉽게 제가 모아두는 책 글귀함에 저장할 수 있고, 또 독후감 쓸 때도 쉽게 인용할 수 있고요. 아! 또 있네요. 눈이 침침할 때는 전자책더러 대신 읽어달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읽은 전자책은 앱에 그대로 차곡차곡 쌓여있으니까 종이책처럼 굳이 서가로 손을 뻗칠 필요 없이 금방 앱에서 꺼내 볼 수 있구요.

 

 

이렇게 하여 최근에 본 전자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박은정 뒤침, 문학동네 펴냄)》는 저에게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네요. 이 책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책인데, 지은이는 2차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여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정리하여 책으로 냈습니다. 여자들의 눈으로 본 전쟁은 기존의 전쟁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녀들이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하였습니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전쟁 이야기이기에, 저자가 이 책을 내려고 할 때 소비에트 당국은 당황합니다. 전쟁의 승리와 미담만 자랑하던 당국은 전쟁의 비극과 치부를 드러내는 이런 책의 출판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고르바초프의 페테스로이카 때 가서야 겨우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책이 나오니, 책을 통하여 그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2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1992년 소비에트 당국은 신화화되고 영웅시되던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녀의 책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재판에 부칩니다. 그렇지만 한번 그녀의 책으로 깨어난 시민들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러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재판은 끝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니, 책의 내용이 몹시 궁금하실 것입니다. 몇 가지만 인용해보지요.

 

“몇 날 며칠, 몇 주를 머리만 내놓고 목까지 늪에 잠겨 있었어. 우리 일행 중에 여자통신병이 있었는데,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지. 아이가 배가 고파서…… 젖 달라고 보채는데…… 엄마도 먹은 게 없으니 젖이 나올 리 없었지. 아이가 울어댔어. 아이는 울지, 독일군 추격대는 코앞에 있지…… 수색견까지 데리고…… 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서른 명이나 되는 우리 목숨이 다…… 이해가 돼? 결국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어…… 누구도 지휘관의 결정을 아이 엄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그대로 한참을 있었어…… 아기는 더는 울지 않았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 우리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었어. 눈을 들어 아기 엄마를 마주 대할 수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매질을 하고 매달아 놓고. 그것도 언제나 완전히 발가벗겨서.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손으로 겨우 가슴만 가릴 수 있었어…… 여자들이 정신줄을 놔버리는 걸 봤어……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 콜랴가 있었어. 우리가 ‘엄마’란 말을 가르쳤지. 그 어린것이 엄마한테서 떼어놓자 이제 엄마랑 영영 이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소리쳐 부르는 거야. 그건 말이 아니었어.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었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전부 다…… 아,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어땠는지 당신은 몰라! 그들은 게슈타포 지하실에서 죽어갔어. 그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는 오직 그곳, 거기 지하실 벽만 알지. 이제, 4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 앞에 무릎을 꿇어. ‘죽는 것이 가장 쉽다’고 그들은 말했어. 하지만 사는 건…… 아, 얼마나 살고 싶어들 했는지! 우리는 승리가 오리라는 걸 믿었어.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그 위대한 승리의 날을 살아서 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

 

“아직도 갓난아이의 비명소리가 내 귓전에 울리곤 해. 우물에 던져진 아이의 비명. 혹시 그런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아이가 우물 속으로 떨어지면서 소리소리 지르며 우는데, 마치 저 깊은 땅 밑에서, 저세상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았어. 그건 아이의 울음이 아니었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지…… 그리고 톱으로 사지육신이 잘려나간 젊은 남자의 주검…… 우리 빨치산 병사의 주검…… 그런 일을 목격하고 임무를 수행하러 갈 때면 내 심장은 오로지 한 가지 염원으로 불탔어. ‘놈들을 죽이겠다. 죽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죽이겠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주겠다.’

 

어떻습니까? 저는 글을 인용하면서 다시금 피가 끓고 눈앞이 흐려지는군요. 전쟁은 인간을 광기로 몹니다. 선의의 전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미쳐 돌아가기에 평상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일을 인간은 마구 저지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평화가 찾아왔을 때 피해자나 가해자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들은 모두 전쟁의 상흔에서 괴로워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인간의 잔인함 뿐만 아니라 인간의 더러운 이기심도 보게 됩니다. 독일군이 철수하고 난 뒤,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점령지 하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책에 보면 선생이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다른 반으로 옮기겠다고 합니다. 자기네 반에는 최우수학생들만 모여있다고요.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아들도 최고등급의 성적을 받았거든요.

 

그러나 선생은 적과 함께 살았으면서 어떻게 최우수반에 남기를 바라냐고 합니다. 아이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릅니다. “누가 그 적을 모스크바까지 오게 했죠? 누가 우리하고 아이들만 여기 남겨두었냐고요?” 우리나라도 6.25 전쟁 때 9.28 수복 뒤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점령지 하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차별하였다지요. 당시 정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방송하면서 정작 자기네들은 서울을 빠져나간 뒤 한강다리를 폭파했으면서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하여 프랑스 지하운동단체에 합류하여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전쟁이 끝나 돌아온 남자를 공산당은 체포하여 재판에 넘깁니다. 이를 항의하는 아내에게 예심판사는 ‘조용히 하시오. 프랑스의 창녀 주제에! 입 다물어!’라고 소리칩니다. 공산당은 왜 전사하지 않았냐며 남편의 행적에 의심을 하고 체포한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무공십자훈장을 받은 남편을 말입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적과 싸웠고 승리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어. 그래 우리는 승리했어.... 그건 민중이 쟁취한 승리였어!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민중을 믿지 않았어. 그게 우리에게 주는 고국의 보답이었어.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흘린 피에 대한 보답...”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간호병으로, 직접 전투요원으로, 지하저항단체의 일원 등으로 전쟁을 겪은 다양한 여자들의 생생한 육성증언이 펼쳐집니다. 그들의 증언이 생생하고 절실하였기에 이들의 육성을 기록한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또 이를 두친 박은정 씨도 그녀들에 감정 이입되어 몇 번씩이나 펜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박은정 씨도 이렇게 말하네요.

 

"나는 이 여인들의 삶에 일어난 그 시간들 속으로, 사건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어느새 그네들과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네들과 함께 울었고 함께 분노했고 함께 절망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하고 무섭고 치가 떨렸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편안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이렇게 번역자도 함께 분노하고 절망하며 번역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자들의 다양한 증언이 실려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하이라이트 한 부분들을 모아놓으니, 평소 다른 책들을 보며 밑줄을 쳐놓은 분량보다 엄청 많네요. 제가 하이라이트로 해놓은 부분을 전부 들려주고 싶으나, 벌써 글이 많이 길어졌는데, 이만 멈춰야겠지요. 이제까지 통상적인 전쟁기록만 보느라고 식상하셨습니까? 그런 분이라면 여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꼭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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